• 5
    드라마
    2024-05-08

    불안한 사람들

    Anxious People
    5
    감상일 2024-05-08
    국가 스웨덴
    장르 드라마
    감독/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리뷰

    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이은선 옮김

    2021년 5월 14일 초판 1쇄 발행


    (리뷰 추가)

    좋았던 구절


    이건 여러 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지 잊어버린 사람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인간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려움이 가중된다고 말이다.

    요즘은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많다. 취직도 해야 하고 살 집도 마련해야 하며 가정도 일구고 세금도 내고 깨끗한 속옷도 챙겨야 하고 빌어먹을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외워야 한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난장판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간다. 세상이 시속 32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뱅글뱅글 관통하는 동안 우리는 없어진 무수한 양말처럼 그 표면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우리의 심장은 비누와 같아서 손에 잘 쥐어지지 않는다. 긴장의 끊을 놓는 순간 금세 표류하고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받는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직업과 결혼생활과 아이들과 기타 모든 분야에서 ‘척’하는 법을 터득한다. 정상인 척, 제법 교양 있는 척, ‘원리금 균등분할상환’과 ‘물가상승률’이 뭔지 아는 척한다. 

    … 

    우리는 예전에 열대어를 키우려고 했다가 깡그리 죽인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열대어에 대해서만큼이나 없기 때문에 엄청난 책임감으로 매일 아침 벌벌 떤다. 계획도 없고 그저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가끔은 껍데기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슴이 정말 아플 때도 있다. 공가금도 내야 하고 어른도 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지독히 높은 일이라서 겁에 질릴 때도 있다.

    모든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는 누구나 어떻게 하면 계속 인간덥게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다. 우리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졌던 짓들을 가끔 저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딱 하나의 지독하게 한심한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p.15—17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뭔가 하면 은행 강도가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은행 강도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은 없다. 어른이 되는 것이 끔찍한 이유는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앞으로는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공과금을 납부하고, 치실을 쓰고 회의에 늦지 않고, 줄을 서고 서식을 작성하고, 케이블과 씨름하고 가구를 졸비하고,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고 전화 요금을 내고 커피 머신을 끄고 아이들 수영 수업을 잊지 않고 신청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상이 우리 머리 위에 “잊어버리지 마!”와 “잘 챙겨!”로 이루어진 폭탄을 새롭게 투하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다른 폭탄이 위에서 쏟아질 것이기에, 우리는 여유롭게 생각하거나 숨을 돌리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그 산더미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회사나 학부모 간담회나 길거리에서 가끔 주의를 두리번거리다가, 남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들은 여러 가지를 감당할 여유가 되고 여러 가지를 잘 다룰 줄 알며 그러고도 에너지가 남아서 더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의 집 아이들은 모두 수영을 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진작 우리를 말렸어야 했다.


    p.74—75





    …하지만 어떤 사람이 무기를 들고 쭈뼛쭈뼛 들어가 아주 구체적으로 정확히 6천 5백 크로나를 요구한다면 이면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러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p.78





    그들은 거의 항상 뒤늦게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는데, 다리를 건너 반대편 버스 정거장까지 달려갈 때마다 딸들은 깔깔대며 웃는다. “큰사람이 온다! 큰사슴이 온다!” 은행을 털려고 한 부모의 다리가 쌩뚱맞게 너무 길어서 달리면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그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비율을 측정하기 때문에 알라차릴 수 있었다. 아마 우리를 항상 아래에서, 그러니까 가장 안 좋은 각도에서 올려다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를 골탕 먹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약삭빠른 꼬마 괴물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모조리 건드릴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항상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용서한다.

    아이가 생겼을 때 가장 신기한 부분이 그것이다. 은행 강도인 부모뿐 아니라 모든 부도가 그렇다. 그 모든 면모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의 사랑을 받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이를 한참 먹은 뒤에도 자기 부모가 완전히 똑똑하고 엄청나게 재밌는 불사신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어쩌면 거기에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가 특정 연령까지 당신을 조건 없이, 대책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딱 하나, 당신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영리한 행동이다.

    은행 강도가 된 부모는 딸들을 절대 진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당사자들이 그 이름을 가장 쓰기 싫어 하는 것과 같은 부분들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 전에는 절대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지어서 붙인다. 사랑하면 우리만의 단어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 강도가 된 부모는 각각 6년과 8년 전, 아직 엄마 배속에 있었을 때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발버둥 쳤는지를 근거로 딸들을 부른다. 한 아이는 배 안에서 계속 점프하는 느낌이었고 한 아이는 항상 나무를 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아이는 개구리, 한 아이는 원숭이다. 그리고 큰사슴은 그 둘을 위해 무엇이든 못 할 게 없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도. 어쩌면 당신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바보 같은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당신의 삶에도 있을지 모른다. 


    p.90—91





    그녀는 병원에서 곧장 다리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그녀를 끌어내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 발 내디뎠을까, 뒤로 물러났을까? 그래서 그녀는 이후로 날마다 뛰어내린 남자와 자신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걸 발판 삼아 직업과 경력과 모든 인생을 선택했다. 그녀는 심지학자가 되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 발을 저쪽으로 내밀고 난간에 서 있는 것처럼 괴로움에 뭄부림을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겪어봤어요. 나는 거기서 무사히 내려오는 방법을 알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녀가 뛰어내리고 싶었던 이유와,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서 부족하다고 느낀 점들이 어쩌다 한 번씩 불쑥 떠오르곤 했다. 저녁 식탁에서 느낀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대처하는 법, 거기서 빠져나오는 법, 내려오는 법을 찾았다. 불안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다.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거의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잘하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자부심을 선사하고 있을까? 나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일을 잘할까? 마음이 넓고 배려심이 있을까? 괜찮은 녀석일까?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좋은 부모였을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속으로는 그렇다.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문제가 있다면 바보들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바보라서 친절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디아에게는 그것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과업이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p.155—156





    …사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남자와 나디아의 차이점이 뭔지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고 싶지 않기는 해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긴 해도.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는 해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진면모를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라는 아직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전부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일지 모른다. 예컨대 이 이야기도 은행 강도나 아파트 오픈 하우스나 인질극이 주제가 아닐지 모른다. 심지어 바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다리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p.158





    두 아이 모두 아직 같이 살던 시절, 모두들 아직 어지간히 행복했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에 야크는 어머니에게 살릴 수도 없는 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킬 때 그 옆에 앉아 있는걸 무슨 수로 견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 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야크는 누나를 돕지 못했다. 다리 위로 올라간 남자를 구하지 못했다.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뛰어내린다. 남은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사는 일을 하러 출근하고 경찰도 마찬가지다. 


    p.292—293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가 진실이 복잡하길 바라는 이유는 먼저 간파했을 때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다리와 바보들과 인질극과 오픈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여러 편의 사랑 이야기다.


    p.309





    사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손을 주무르며 한문 개수를 센다. 책상은 좁고, 둘 사이에 책상이 없었다면 두 여자는 서로 그렇게 가까이 앉아 있어 불편했을지 모른다. 가끔 우리에게는 거리가 아니라 그냥 장벽이 필요할 때도 있다. 사라의 움직임은 신중하고 나디아는 조심스럽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심리 상담사는 용기를 내서 말문을 연다. 

    “처음 만났을 때 저더러 공황발작이 어떤 건지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거 기억하세요? 제가 제대로 대답을 못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좀 더 훌륭한 답을 알고 있나요?” 사라는 묻는다.

    심리 상담사는 고개를 젓는다.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잠시 후에 나디아는 심리 상담사가 아닌 개인으로서, 심리학 수업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대문 내용이 아니라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하지만 그거 아세요? 공황발작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도움이 되더라고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이 아침에 엉망인 모습으로 출근해 ‘공황발작이 일어났어요’라고 했을 때보다 ‘술이 안깨요’라고 했을 때 동료와 상사에게 더 많은 동정표를 얻겠지만요.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고 있어요, 대다수가 그게 뭔지 모를 뿐이죠. 몇 달 동안 숨이 안 쉬어져서 폐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게 다 뭔가가…… 고장 났다는 걸 인정하기가 더럽게 어려워서 생기는 현상이에요. 영혼으로 느껴지는 고통, 혈관 속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납덩이, 가슴을 누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돌덩이. 뇌에서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죠, 조만간 죽게 생겼다고. 하지만 폐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사라. 우리는 죽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그 말이 둘 사이를 맴돌며 망막 위에서 보이지 않는 춤을 추다가 정적이 내려앉는다. 우리는 죽지 않아요. 우리는 죽지 않아요. 우리는 죽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p.456—458





    …사라는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다무는데, 눈 아래 피부가 마침내 무너진다. 그녀의 공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방울 모양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향해 떨어진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꺼낸다. 심리 상담사는 머뭇거리며 그걸 집는다. 사라는 이 편지 때문에 여길 찾아왔다고, 맨 처음에 온 그날이 그 남자가 뛰어내릴 지 딱 10년째 되던 날이었다고 속삭이고 싶다. 그가 뭐라고 썼는지 큰 소리로 읽어줄 사람, 그녀의 가슴에 불이 나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사라는 다리에 대해, 나디아에 대해, 그 남자아이가 달려가 그녀를 구하는 모습을 본 일에 대해 모두 속삭이고 싶다. 그 뒤로 날마다 어떤 식으로 사람들 간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는지도. 하지만 그녀가 간신히 꺼낸 말은 이게 전부다. “나디아…… 당신과…… 나는……”


    나디아는 책상 저편에 앉아있는 연상의 여자를 끌어안고 싶지만, 안아주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라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심리 상담사는 새끼손가락을 봉투 뒷면의 안으로 넣어서 봉투를 연다. 10년 된 자필 쪽지를 꺼낸다. 적힌 단어는 네 개다.


    p.458—459





    사라는 난간 앞에 서 있다. 몸을 숙여 난간 너머를 내다본다. 딱 1초라는 찰나의 순간 동안 그녀가 뛰어내리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누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녀의 모든 사연과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세상에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끝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뛰어내리고 그럴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잠시 후 그녀가 손을 놓는다.


    바로 위에 서 있는데도 알고 보니 거리가 제법 멀다. 수면을 때리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가볍게 긁히는 소리, 종이를 움켜쥐는 바람, 퍼덕이고 구겨지며 수면을 가르고 점점 멀어져가는 편지. 도어매트에서 맨 처음 그 편지를 주운 뒤로 봉투를 만 번쯤 만지작거렸던 손 끝이 저항을 포기하고 그 나름의 영원을 향해 편지를 띄워 보낸다.


    10년 전에 그 편지를 보낸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녀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적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길지도 않은 딱 네 단어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네 단어였다. 


    당신이 잘못한  아니었어요.”


    p.460—461





    …아이가 특정 나이까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 부모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당신을 평생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명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


    p.473





    진실은 무엇일까? 이 모든 사건의 진실. 진실은 이것이 여러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정말이다. 어른이 되고 서로 사랑하며 USB 단자를 어떻게 꽂는지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꼭 불잡을 수 있는 것, 싸워서 지킬 것, 손꼽아 기다릴 것을 찾는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모두가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대다수는 타인으로 남고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지, 당신의 삶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모르고 지낸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인파 속에서 허둥지둥 엇갈려 지나갔지만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당신이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가 내가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를 스친 순간 서로 멀어졌을지 모른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 번 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p.478–479






  • 5
    드라마
    2024-09-04

    오베라는 남자

    A Man Called Ove
    5
    감상일 2024-09-04
    국가 스웨덴
    장르 드라마
    감독/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리뷰

    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최민우 옮김

    2015년 5월 20일 초판 1쇄


    (리뷰추가)

    좋았던 구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어붙은 땅을 발로 찼다. 적당한 말을 찾고 있었다. 다시 짧게 헛기침을 했다. 

    “당신이 집에 없으니까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베가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해. 당신이 떠나 있으니까 집 안이 하루 종일 썰렁해.”

    그녀는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볼 수 있도록 꽃다발을 들었다.

    다시 침묵.

    그는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를 천천히 돌리면서 계속 거기 서 있었다. 뭔가 할말을 더 찾고 있는 것처럼. 그는 대화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 그건 항상 그녀가 담당하던 것이었는데. 그는 대개는 그냥 대답만 했다. 지금 이건 둘 다에게 새로운 상황이었다. 

    오베는 몸을 웅크리고는 지난주에 가져왔던 화초를 파낸 다음 비닐봉지에 넣었다. 그는 새 꽃을 꽂아 넣기 전 언 땅을 조심스레 뒤집었다.

    “그 인간들이 전기 요금을 또 올렸어.” 오베가 몸을 일으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커다랗고 둥근 바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마치 그녀의 볼을 만지듯 좌우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p.53-55



    ——



    아버지가 죽은 건 오베가 막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철로에서 객차가 돌진했다. 오베에게는 사브 한 대, 마을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무너질 듯한 집, 상처 난 손목시계 말고는 딱히 남은 게 없었다. 그는 그날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게 사는 걸 멈췄다. 그는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철도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차를 탔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처음 웃은 게 바로 그날이었다.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p.68-69



    ——



    그래서 오베는 쫒겨나는 대신 야간 청소원이 되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아침 자기 조를 떠날 일이 결코 없었을 테고, 그녀를 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빨간 구두와 금 브로치와 윤기 나는 갈색 멈리도. 또한 남은 평생 동안 누군가 맨발로 그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볼 일이 없었으리라.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p.114



    ——



    오베는 누가 차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시했다. 바지의 주름진 부분을 폈다. 백미러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넥타이를 매야 했는지 걱정됐다. 그녀는 항상 그가 넥타이를 매는 걸 좋아했다. 그럴 때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인 양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도 자기를 그렇게 볼지 궁금했다. 저세상에서 만났을 때 실업자에다가 더러운 양복을 입었다고 그녀가 자기를 부끄러워하면 어쩌나. 컴퓨터 때문에 자기가 갖고있던 지식이 변변찮은 것으로 판명 나는 바람에 천천히 물러나지도 못한, 자기 직업을 유지 못한 머저리라고 생각할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자기를 의지할 수 있는 남자로 봐줄까?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필요하다면 온수기도 고칠 수 있는 남자로.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노인네에 불과한데도 자기를 똑같이 좋아해줄까?


    p.145-146



    ——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그에게 얼굴을 들어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보다 두 배 더 날 사랑해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오베는 두 번째로—또한 마지막으로—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가 지금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p.232



    ——



    스페인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품을 쩍쩍 하며 돌아다니고, 술을 마셔대고, 레스토랑에서 외국 음악을 연주하고, 한낮에 잠자리에 든다는 이유로 자기네가 제법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오베는 이중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소냐가 이 모든 것들에 푹 빠져 있어서 결국에는 오베도 별 수 없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어찌나 크게 웃는지 그가 그녀를 붙들 때마다 그녀의 몸 전체가 떨리는 걸 느낄 정도였다. 오베라 해도 이런 걸 싫어할 재주는 없었다. 


    p.254-255



    ——



    소냐는 모든 걸 봤다. 그녀는 그가 무엇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화를 내도록 놓아뒀다. 그 모든 분노가 어느 정도 배출구를 찾도록 놓아뒀다. 하지만 여름에 대한 부드러운 약속을 품고 다가온 5월의 어느 저녁, 그녀는 휠체어를 굴려 그에게 갔다. 나무로 만든 마루에 바퀴 자국이 생겼다. 그는 부엌 식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고, 그녀는 그에게서 펜을 빼앗은 다음 그의 손에 자기 손을 밀어 넣은 뒤 손가락으로 그의 거친 손바닥을 꾹 눌렀다. 그의 가슴에 따스하게 이마를 기댔다. 

    “그만하면 됐어요, 오베. 편지는 더 쓰지 말아요. 당신이 쓴 이 편지를 다 집어넣을 공간이 인생에는 없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는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미소를 지었다.

    “이제 충분해요, 사랑하는 오베.”

    그러자 충분해졌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했던 얘기였다. 그녀는 선을 위해 싸웠다.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아이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오베는 그녀를 위해 싸웠다. 

    왜냐하면 그녀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아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p.279-281



    ——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온장 뭉르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p.410-411



    ——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을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 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 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시간은 묘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며칠, 몇 주, 몇 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아마도 바라볼 시간보단 돌아볼 시간이 더 많다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더 이상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없을 때는 다른 것을 위해 살게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건 추억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화창한 오후. 이제 막 꽃들이 만개한 정원의 향기. 카페에서 보내는 일요일. 어쩌면 손자들. 사람은 다른 이의 미래를 위해 사는 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소냐가 곁을 떠났을 때 오베 또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는 그저 살아가는 걸 멈췄을 뿐이었다.

    슬픔이란 이상한 것이다. 


    p.436-437



    ——



    그녀가 협탁에 놓여 있던 봉투를 지벙 들었다. 봉투에는 손글씨로 ‘파르바네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 하나의 삶 전체가 문서로 정리되어 팡리에 들어가 있었다. 인생의 결산. 맨 위에 있는 편지는 그녀에게 쓴 것이었다. 그녀는 부엌 식탁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마치 편지를 채 다 읽기도 전에 파르바네가 눈물로 편지를 흠뻑 적시리라는 걸 오베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p.448




  • 4
    SF
    2026-04-05

    천 개의 파랑

    4
    감상일 2026-04-05
    국가 한국
    장르 SF
    감독/작가 천선란
    키워드 감성 드라마, 로봇

    리뷰

    천 개의 파랑


    천선란

    2020년 8월 19일 초판 1쇄 발행


    묘하게 붕 떠있는 분위기라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처음 읽을 때 보다 책갈피 찝어놓은 부분 디지털 필사하면서 되새김질 할 때가 더 좋더라
    그리고 지수-연재 관계가 우정이면서도 묘하게 덤덤남주와 왈가닥여주의 로맨스 도식이라 좀 웃기고 재밌음ㅋㅋ 아무래도 ~날 이렇게 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계열의 관계성은 클래식이죠
    좋았던 구절


    이제 내 다리는 투데이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투데이는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것이다.

    투데이는 며칠 전까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였고 나는 폐기를 앞둔 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투데이는 다시 주로를 달린다. 나는 떨어지고 있다. 땅에 닿으면 부서진다. 인간을 이런 예측을 본능적인 감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확한 수치와 계산에 의한 결괏값만을 산출한다. 내 미래에는 예측 오류란 없다. 나는 내가 여기 오게 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다.

    내 이름은 콜리다. 브로콜리의 색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p.10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빠르고 무엇이 느려도 된다는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궁금했으면서 왜 묻지 않았을까. 보경은 그 순간의 자신을 자주 탓했다. 그때 묻지 못한 죄로 그 말에 대한 궁금증은 영원히 미제로 남았다.


    p.164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p.168




    봐봐, 없지?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열심히 할 거야.

    뭐를?

    뭐든! 밥 먹는 거든, 약 먹는 거든, 운동하는 거든, 공부하는 거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열심히 하고 있을래. 그렇게 있다 보면 무슨 일이든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알겠어.

    뭐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걸 해볼게. 그리고 내가 나를 응원해볼게.


    p.187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산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p.189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p.204-205




    복희는 정정해야 했다. 관심이 없어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다. 어느 생명체의 일생을 전부 책임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생을 마감한 동물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것도 겁났다. 복희는 자신이 철저하게 겁쟁이였음을 수의사가 된 후에 인정했다. 이곳에 오는 보호자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는 자들의 자세.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으며 복희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p.246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p.278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화재가 난 빌딩 속에 있던 소방관을 기다리던 그 시간에 멈춰 있어. 반드시 살아서 나오리라 믿고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무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p.285-286




    지수는 단순하다. 3주 남짓 억지로 붙어 있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표정이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표정과 말이 달라 오류를 일으킬 때도 많았다. 그런 지수의 모습이 이상하거나 싫다는 건 아니었다. 연재가 짖지 못하는 표정이어서 신기해 오래도록 보는 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p.291




    콜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연재는 생각해본 적 없던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연재는 그 대화 탓에 그날 밤 잠들기 직전까지 바다에 빠진 지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했듯이 아홉 명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수를 가장 먼저 구할 거였다. 보경이 있었다면 보경을, 은혜가 있었다면 헤엄을 칠 수 없는 은혜를 가장 먼저 구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 번째네.

    연재는 누워서 세 번째나 네 번째가 될 만한 사람이 더 없는지 고민했다. 민주도 떠올랐지만 민주는 개헤엄을 쳐서라도 살아남을 사람 같았다. 다영과 지수 사이에서는 꽤 오래 고민했는데 불현듯 다영이 수영을 취미로 배운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세 번째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그랬다. 이 사실은 지수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으리라. 말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괜히 말해줬다가 평생 놀림을 받을 게 눈에 훤했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지수에게 자신은 과연 몇 번째일까.


    p.295-296




    “알겠어, 알겠어, 고마워 죽겠다고? 네 속마음으로 다 들었어.”

    지수는 이미 연재에게 고맙다는 말 듣기를 포기했으니 그걸로 고맙다는 말을 퉁쳐도 됐을 거였다. 지수도 더는 기다리지 않는 낌새였다. 하지만 연재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엉?”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려던 지수는 도로 손을 내리고 되물었다.

    “고마흐다고.”


    p.297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옆에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p.327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p.349




    나의 최후다. 엉덩이부터 상체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맑은 하늘이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p.354







    심사평 중


    이지용 건국대 학술연구교수


    … 다양한 소재와 설정,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잡지 못하고 파편화된 상태로 부유하는 모습들이 많았다. 소재를 차용하고 세계관을 설정한 작가조차도 그것을 충분히 신뢰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SF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경이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작가가 먼저 설정한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재와 설정을 그저 나열하게 되면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한계를 드러내지만, 결국 독자가 작가가 설정한 경이의 세계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결말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결망에서의 파급력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경이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세계 안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p.362



  • 5
    SF
    2023-12-20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5
    감상일 2023-12-20
    국가 영국
    장르 SF
    감독/작가 올더스 헉슬리/이덕형(역)
    키워드 디스토피아

    리뷰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1988년 8월 30일 1판 1쇄 발행

    원작 1932년


    처음 이 소설 영업 당했던게 모 탐조유투버의 다큐영상 덧글에 구독자가 인용한 문장이 너무 좋아서였는데... 결국 그 유투버 좀 이상해져서 구독 해제했지만 멋진 신세계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1932년에 나온 소설이 이렇게까지 현대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하다고?? 하는 놀라움에 이어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임에도 가장 인간다운 무언가를 찬양하고 자유를 외치는 서사라니 이러면 오타쿠 울죠

    나중에 읽게 된 조지 오웰 1984는 상대적으로 삭막한 플롯이라... 디스토피아 사제대결에선 갠취로 헉슬리 승

    좋았던 구절




    “린다!” 야만인은 애원하듯 소리쳤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그는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그에게 잊을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린다의 흐물흐물한 손을 힘껏 쥐었다. 이 추잡한 쾌락의 꿈으로부터, 이 천박하고 증오스러운 추억으로부터 이 현실의 세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강제로 끌어내고 싶었다 — 아연실색할 현재, 무서운 현실, 그러면서도 공포심을 재촉하는 긴박성 때문에 숭고하고 처절하도록 중대한 현재로 끌어내고 싶었다. 

    “린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어?”


    p.258–259




    “당신들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다움과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그러면 내가 가르쳐주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의 안뜰로 향한 창문을 열더니 약상자를 열고 소마 알약을 한 주먹씩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카키색의 군중들은 이 오만한 신성모독에 놀라움과 공포로 말을 잃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미쳤군.” 버나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속삭였다.

    “저들이 그를 죽일거야. 죽일거야.”

    군중들로부터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야만인을 향하여 무서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위협적인 물결이었다. 

    “포드 님, 그를 구해주소서!” 버나드는 기도하고 눈을 외면했다.

    “포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헬름홀츠 왓슨이 말하며 웃었다. 아니 웃음을 머금은 채 군중을 헤치며 뛰어들었다. 

    “자유! 자유!”

    야만인은 외치며 한 손으로는 계속 소마를 밖으로 내던지고 다른 손으로는 공격해오는 군중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그게 그 얼굴이었다. 

    “자유다!” 하고 다시 외칠 때 갑자기 그의 옆에 헬름홀츠가 와 있었다. 

    “착한 헬름홀츠!” 그는 여전히 주먹질을 멈추지 않으며 그를 반겼다. “마침내 인간이 된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열린 창문을 통해 한 줌씩 소마를 버렸다. 

    “그렇다. 이제 인간들이 되었어! 인간이!”



    결투장의 입구에서 머뭇거리던 버나드는 “둘 다 죽겠군”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의 채찍을 받아 그들을 돕기 위해 앞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발을 멈췄다. 그러나 곧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다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굴욕적인 우유부단의 번뇌에 사로잡혀 서 있었다 — 내가 돕지 않으면 두 사람은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을 돕다가는 내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포드 님에게 찬미하라!) 돼지 주둥이 같은 코가 달린 방독면과 물안경을 쓴 경찰들이 뛰어들었다. 

    버나드는 경찰관들 쪽으로 달려갔다. 버나드는 양팔을 흔들었다. 이것은 어떤 행위였고 그는 분명 뭔가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살려!”를 몇 번 반복했다. 자신도 구조업무를 감당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려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p.269–271




    “왜 비슷한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까?”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강철이 없이는 값싼 플리버 승용차도 만들 수 없어.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산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자네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 말일세. 자유라!” 총통은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델타 계급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다니!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자네답군!”

    야만인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p.279




    야만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소름끼칠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실제의 행복이란 것은 불행에 대한 과잉보상에 비하면 항상 추악하게 보이는 법일세. 또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안정이란 것은 불안정처럼 큰 구경거리가 될 수 없는 법일세. 따라서 만족하는 생활은 불행과의 처절한 투쟁이 지니는 매력이나 유혹과 투쟁이 지니는 장관이나, 정열 내지 회의에 의한 치명적인 패배가 지니는 장쾌함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야. 행복은 결코 장쾌한 것이 아니야.”


    p.280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거든.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해. 우리가 새로운 발명을 선뜻 적용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순수과학에서의 모든 발견은 유해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거든. 과학도 때로는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다루어야 돼. 그렇지, 과학조차도 그렇지.”



    “그렇지.” 무스타파 몬드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것도 안정을 위해 희생시켜야 할 품목이야.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예술뿐만이 아니야. 과학도 마찬가지야. 과학은 위험한 것이야. 우리는 그것을 용이주도하게 묶어놓고 재갈을 물려 놓아야 해.”


    p.285




    “하지만 신은 모든 고귀하고 아름답고 비장한 것의 근거가 아닙니까? 만일 신이 있다면…”

    “젊은 친구”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문명은 고귀함이나 비장함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세. 그러한 것은 정치적 비능률을 나타내는 징후일 뿐이야. 우리처럼 적절히 조직된 사회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고귀하고 영웅적이 될 기회란 있을 수 없는 걸세. 그러한 계기가 발생하기 전에 여건이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겠지. 전장애 일어나거나 어느 쪽에 충성을 맹세할지 모르는 경우이거나 저항해야 할 유혹이 있거나 쟁취하거나 방어할 사랑의 대상이 있는 경우 —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고귀함과 비장함도 어떤 의미를 가질 거야. 그렇지만 오늘날엔 전쟁이 없단 말일세.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최대의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일세. 어느 쪽에 충성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조건반사 훈련이 되어 있단 말일세. 또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대체로 매우 유쾌한 것이며 여러 가지 자연적인 충동은 모두 자유롭게 만족되기 때문에 저항할 유혹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만일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어떤 불쾌한 사태가 일어나면 까짓것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도피시켜 줄 소마가 항상 준비되어 있네.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과 화해시키고, 인내하고 수난을 참도록 하는 소마가 있다 이 말이야. 옛날에는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거치고 오랜 수양을 쌓아야 겨우 도달되는 미덕이었지. 그러나 이제 반 그램짜리 두세 알만 삼키면 그러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일세. 이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네. 그러니까 덕성의 반은 적어도 병 속에 지참하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야.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기독교 정신을 터득하는 것 — 그것이 소마의 본질일세.”


    p.302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변화를 위해 눈물이 따르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하고 야만인은 말을 계속했다. 

    “이곳에는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p.303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 하고 그가 말했다.


    p.305









    헉슬리는 이 <<멋진 신세계>>를 발표하고 십 몇 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 소설의 전후판의 서문에 작가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할 때만 해도 필자는 이 소설의 중요 인물인 문명국을 방문한 야만인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문명국에서의 바보들의 행복에 의한 미치광이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야만국으로 돌아와서 그 우매함과 추악함을 감수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가능성이었다. 어느 편도 구원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쓰면 양자택일을 떠나서 야만족 주변에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다고 술회했다. 




    ->끝내 "야만"이라 칭해지는 자유를 선택하는 엔딩이 좋았음... 본편 외에 마지막에 삽입된 제 3 사회 설정도 흥미로웠다.





  • 5
    추리, 미스터리
    2022-07-03

    솔로몬의 위증

    ソロモンの偽証
    5
    감상일 2022-07-03
    국가 일본
    장르 추리, 미스터리
    감독/작가 미야베 미유키/이영미(역)
    키워드 사회파 추리물, 군상극, 성장

    리뷰

    솔로몬의 위증



    미야베 미유키

    이영미 옮김
    2013년 6월 12일 초판 1쇄 발행

    내가 좋아하는 소재: 사회파 추리, 군상극, 사춘기 시기의 풋풋하고 불안한 아이들과 성장 드라마를 다 말아주는 종합 선물 세트
    내 안의 미미여사 랭킹은 영원히, 압도적으로 모방범만이 1위 자리를 지킬 줄 알았는데... 솔로몬의 위증이 모방범 아래에 만만치 않은 2위로 등록됨
    사회파 추리소설 기준으로는 여전히 모방범이 1위지만... 약간 만화적인 캐릭터 구성과 후반부의 벅차오르는 감동은 솔로몬의 위증이 더 커서 진짜 그냥 둘이 다른맛으로 재밌고 이 맛을 못잊어서 영원히 신작을 외치며 울게 돼  
    미미여사님 제발 시대극말고 현대장편추리물 계속 써주시면 안돼요?
    좋았던 구절

    1부 사건




     —그런데 알고 보면 휴가철이나 크리스마스, 명절 연휴 같은 때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대요. 우울하거나 불우한 사람에게는 자기만 빼고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게 괴롭겠죠.


    p.10–11





     “잘됐다, 주리짱.”

     그 순간 분노의 절규가 주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올랐다. 거센 바람 소리와도 비슷한 그것이 주리를 포악스럽게 뒤흔들었다. 열네살 소녀의 가녀린 몸은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잘되긴 뭐가 잘돼! 잘된 건 하나도 없어! 대체 넌 왜 그걸 몰라?

     사실 나는 이런 것과 상관없이 살고 싶었다. 이런 심정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로 알게 된 것이다. 억지로 이런 일을 강요당한 것이다.

     주리는 더는 그 분노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요새는 마음속에서 쉴새없이 날뛰는 분노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이 투서를 쓰고 여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왜 분노는 편지가 우체통 바닥으로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

     핵심이 빠져 너덜너덜해진 찌꺼기 같은 목소리로 주리는 말했다. “응, 돌아가자.”


    p.208–209





     하지만 지금은 신변의 안전을 지키는 게 먼저다. 이제 두 번 다시 등을 걷어차이거나 남자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처박히지 않도록. 아래로 떨어지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아파트 계단 난간에 손을 얹고 한 시간씩 서있거나, 면도칼을 쥐고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울지 않도록.

     그리고 나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세 사람에게 합당한 보복을 해주겠다.

     그러기 위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장을 고심하고, 자와 볼펜을 놀려 완성해낸 이 고발장.

     이것은 올바른 일이다.

     왜냐하면 난 봤으니까. 정말로 봤으니까. 그래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미야케 주리의 입술이 현실세계의 그 어떤 자로도 그을 수 없는 완벽한 직선을 그렸다. 그것은 정의와 복수 두 점 사이를 최단거리로 연결한 선, 주리만이 시작점과 끝점을 아는 직선이었다.


    고발장


    고토 제3중학교

    2학년 A반 가시와기 다쿠야는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살해당했습니다

    학교 옥상에서 떠밀렸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그날

    저는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가시와기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를 밀어뜨린 사람은 

    2학년 D반의 오이데 슌지입니다

    하시다 유타로와 이구치 미쓰루도 거들었습니다

    세 사람은 웃으면서 도망쳤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사건을 조사해주십시오

    이대로는 가시와기가

    너무 불쌍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경찰에 알려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p.220–221


    ->하 ㅁㅊ주리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맨첨에 읽을땐 헐대박ㄷㄷ대존잼 이러면서 후루룩 읽던 파트가 나중에 너무 아픈손가락 돼서 내가진짜ㅠㅠㅠㅠㅠ








    2부 결의




     “사건에 대한 흥미라고 하면 안 될까요?”

     “거짓말 마. 넌 그런 구경꾼이 아니야.”

     “해결하고 싶은 야심, 혹은 공명심?”

     가즈히코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타오 선생이 피식 웃었다.

     “그런게 있긴 하냐? 그 다음은?”

     “멋지잖아요?”

     “누구한테 보여주고요. 누구야? 역시 후지노?”

     “왜요, 후지노 귀엽잖아요.”

     기타오 선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정말 그애가 마음에 없나보구나. 그런 와 닿지도 않는 소리를 잘도 하는 걸 보니.”

     그 말에는 겐이치도 동의할 수 없었다. “후지노가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야. 물론 예쁘지. 크면 더 예뻐질 테고. 하지만 귀엽진 않아. 귀염성이 없어. 귀여움으로 어필하는 여자애는 아니야.”

     아아, 그런 뜻이라면 알겠어요. 가즈히코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불끈 쥔 겐이치의 주먹이 갈 곳을 잃었다. 난 후지노가 귀여운데.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용감하다. 용기를 쥐어짜내는 그애의 모습이 귀엽다.


    p.321–322


    -> ^_____^ 좋아하는 여자애의 모든 면모가 다 좋아서 난 귀여운데. 하는 풋풋한 첫사랑이 너무 귀여워... 그치만 선생님은 애들앞에서 뭔말을 하시는거죠?





     —정말 하는구나.

     겐이치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한편으로 왠지 차가운 긴장감도 느껴졌다. 체육관이 법정이 된다. 그곳에 오이데 슌지가 피고로 선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발걸음을 늦추며 불쑥 말했다.

    “만약 유죄 평결이 나오면 우리 피고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한번 생각해둬야 하지 않아?”

     가즈히코가 걸음을 멈췄다. 한낮의 열을 머금었다가 후텁지근한 기운을 피워올리는 아스팔트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겐이치는 그를 앞지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우리끼리 생각하는 것보다.”

     가즈히코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커다란 태양은 두 사람의 등뒤에 있는데도 눈이 부신듯이 실눈을 떴다.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겐이치의 집 앞 길가에 오이데 슌지가 서 있었다. 색상도 무늬도 화려한 티셔츠에 후줄근한 청바지. 비치샌들을 꿰신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상반신을 흐느적거리며 딴 데를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밑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해질녘이라 그림자는 이미 옅어졌지만, 오히려 슌지는 그 그림자에 모든 힘을 빼앗긴 듯 훨씬 연약해 보였다.

     “기껏—찾아와줬더니만.”

     가즈히코는 말이 없었다. 겐이치도 마찬가지였다.

     오이데 슌지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엉덩이에 손을 문질렀다. 얼굴은 여전히 딴 데를 보고 있다.

     “나는.”

     가즈히코는 기다렸다. 겐이치도 마찬가지였다.

     “내 결백을 입증할 거야.”

     내 결백을 입증할 거야. 아마 오이데 슌지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게 입 밖에 낸 말이리라.

     “그러기로 결심했어.”

     순지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반짝거렸다. 이마도 빰도 턱 끝도. 물론 이런 길가에 오래 서 있으면 땀범벅이 되게 마련이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 거야.”

     내 재판을.

     “그러니까 부, 부, 부탁해.”

     고개를 숙이고, 불끈 쥔 주먹을 코에 대고, 오이데 슌지가 말했다.

     “응.”

     맥빠질만큼 순순히, 간단하게, 간바라 가즈히코가 대답했다.

     “잘 알았어.”

     가즈히코가 먼저 오른손을 내밀고 슌지가 머뭇머뭇 그 손을 잡았다. 조수 노다 겐이치는 석양빛 아래 악수를 나누는 변호인과 피고인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싸우자.


    p.644–645





     “—너무해.”

     소인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뒷면에 휘갈긴 전단지는 두말 할 것 없이 우편함에 직접 넣고 간 것이리라.

     “엄마가 숨겨놨어.”

     “그랬구나.”

     주리의 눈이 새빨갰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오늘 발견했어.”

     숨길거면 차라리 버리지. 료코는 버럭 화가 났다. 저 어머니 성격으로 보아 증거로 보관했다가 나중에 고소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걸 보고 울었구나.”

     계속 울었구나, 미야케.

     “도망치면.”

     주리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거짓말쟁이가, 돼버려.”

     그러니 재판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어.”

     나도 봤어, 라고 말했다.

     “마쓰코랑 같이, 나도 봤다고.”

     자꾸 뭐가 목에 걸리는 듯 주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무서워서, 말 못 했어. 그렇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정말로, 있었어. 정말로, 봤어.”

     듣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있었어. 정말로 봤어. 그 고백이 료코를 때리고, 료코를 뒤흔들었다.

     검사로서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던 것을 료코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픈 심정은 미야케 주리도 마찬가지다. 오이데 슌지나 모리우치 선생과 마찬가지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라고.

     사건 초반부터 주리가 고발장을 썼다는 소문만 나돈 게 아니었다. 주리는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그 두 가지는 늘 한 세트였다. 엉터리 고발장을 꾸며낸 거짓말쟁이 미야케 주리.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항변할 기회가, 주리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회야말로 교내재판 법정에서 주어져야 한다.

     “—목소리가, 나오면, 직접 말할 수 있어.”

     힘겹게 말하는 주리에게 후지노 료코는 크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며 힘을 잃었다.

     “후지노, 넌 , 날 안 믿잖아.”

     주리가 가까스로 눈길을 들어 료코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날, 믿는다고.”

     료코는 목속의 피가 서서히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피가 가라앉고 그 자리로 따뜻한 피가 흘러들었다.

     그렇다, 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미야케를 믿는다고. 고발장 내용을 믿는다고. 

     “미안해.”

     그 말 또한 피가 흘러나오듯 료코의 몸에서부터 새나왔다.

     “난 자신이 없었어—“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떻게하면 주리에게 전할 수 있을까.

     “미야케, 왜 목소리가 돌아왔을 것 같아?”

     주리가 의심쩍은 듯 실눈을 떴다.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료코는 흩어진 편지와 전단지를 집어들고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난당하는 게 분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되받아 치고 싶어져서 그래. 자기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어져서 그래.”

     그래, 맞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난 그걸 믿는다.

     “난 그 마음을 믿어. 처음에는 나도 확신하지 못했어. 내가 과연 검사같은 걸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어. 그렇지만 재판을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알게 됐어.”

     내가 서야 할 자리를. 눈을 두어야 할 곳을.

     진실은 지금까지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밝혀내야 한다. 

     “나는 이 사건의 검사야. 그리고 널 믿어.”

     스테레오 오디오에서 아름다운 소프라노 독창이 울려퍼졌다. 

     주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몸 전체를 울리는 놀라우리만큼 굵은 소리였다. 이거다. 이렇게 해서 주리는 목소리를 되찾았다. 공포를, 분노를, 절망을 쏟아내기 위해.

     긴 침묵을 깨고 주리가 내뱉은 비명을 받아줄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껏 아무도 하려 들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나, 후지노 료코다.


    p.663–665


    ->사랑해............... 윗 발췌본이랑 이거랑 둘 다 같은 감상임. 같은 진영에서 싸워야 하는 입장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던 아이들이 마음의 둑을 허물고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니 너무 아름다워..........








    3부 법정




     오늘 아침 소동을 가장 유쾌하게 넘긴 것은 이노우에 가족이었다. 다급하게 취재를 시작한 미디어 관계자들에게도 판사의 당당한 모습에 감탄하거나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모여든 참이었다.

     그들에게 맞선 것은 야스오의 아버지였다. 계속 울려대는 전화와 인터폰에 분통이 터진 그가 “내가 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마”라고 선언하자, 아내와 딸과 당사자인 아들이 만류했다.

     “아버지가 할 바엔 내가 하는 게 이치에 맞아.”

     야스오는 그렇게 주장했다가 수면 부족인 누나에게 꿀밤을 맞았다.

     결국 누나의 제안으로 택시를 집 앞까지 불러 가족이 다함께 등교했다. 사정을 모르는 운전기사는 놀라면서도 베테랑다운 능숙한 솜씨로 뒤따라오는 기자와 리포터를 따돌렸다.

     “수상이 된 기분이군.” 야스오의 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취재 열기가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어.”

     “취재 열기는 무슨.” 야스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나저나 오랜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네. 내 배에서 어떻게 야스오 같은 아이가 나왔나 신기했었는데. 야스오 너한테 내 유전자는 안 갔나보다. 전부 아빠 유전자야.”

     “그래서 머리가 좋다는 거야?”

     누나의 질문에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별나다는 거지.”

     “동의 못 해.”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말했다.


    p.421–422





     어린아이들 미성년자들, 일방적인 폭력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할 권리가 있다. 어떤 사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인이 주위에 알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저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료코는 다카기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만약 그때 엄마 구니코가 거세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발끈한 다카기 선생님도 나쁘지만 선생님에게 반항한 너도 나쁘다며 참으라고 했다면, 내신서에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되도록 원만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스이 노조무도 마찬가지다. 그애는 줄곧 부당한 인내를 강요당했다. 부모님이 그애를 위해 내린 결정일지라도 본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 배려는 잘못된 것이다. 합의했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건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의 주장이다.


    p.423–424





     “두번째는 이처럼 명쾌하지 못한 케이스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을 당한 상대나 혹은 그에 영향을 받은 불특정한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행했는데, 결과적으로 사람이 죽고 만 경우입니다. 이 ‘어쩌면 ㅇㅇ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의지를 ‘미필적 고의’라 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고 말았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p.458





     “고발장을 쓴 사람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다고 주장하며 피고인을 고발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변호인은 반복했다.

     “그 사람에게는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장난을 즐기는 피고인이라는 인간을, 장난으로 서슴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인간을, 장난으로 남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기를 즐기는 인간을 학교에서—조토 제3중학교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쫓아버릴 더없이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변호인이 물었다. 이 규탄이 형식적으로나마 질문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수사적인 물음을.

     “피고인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피고인을 함정에 빠뜨릴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피고인에게 상처받고 피고인을 원망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고발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즉, 고발장을 쓴 것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든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방청석이 술렁였다. 줄지어 앉아 있던 사람들의 물결이 허물어졌다. 뒤를 돌아본 료코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벌떡 일어섰다.

     미야케 주리다. 기절했는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널브러진 것이다.


    p.474–475





     교내재판 관련자들은 예기치 않게 주어진 휴일을 각각 다른방식으로 보내고 있었다.

     배심원장인 다케다 가즈토시는 집 근처 공원에 딱 하나 있는 낡은 농구 골대 아래서 아침부터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휴일의 텅 빈 파란 하늘에 여름 끝자락의 소나기 구름이 떠 있었다.


    p.500–502





     “그럼 다케다 배심원장에게 묻겠습니다. 평의 결과, 배심원단은 누가 가시와기 다쿠야 군을 상해했다는 결론을 냈습니까?”

     다케다 배심원장은 의연하게 얼굴을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가시와기 다쿠야 군입니다.”

     료코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판사가 “정숙!” 하고 소리쳤다. 

     노다 겐이치는 떨고 있었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고개를 들어 넋을 놓고 키다리 배심원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건은 가시와기 다쿠야 군에 의한, 가시와기 다쿠야 군 살해사건 입니다. 저희는 가시와기 다쿠야 군이 미필적 고의의 살의에 의해 가시와기 다쿠야 군을 살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죽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리긴 아쉽다.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짓을 하면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얼어붙은 옥상 철조망 너머에서.

     “가시와기 군이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는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배심원장의 목소리가 차츰 안정을 찾았다.

     “좀더 일찍 가시와기 군의 갈등이 해소되도록, 고민이 덜어질 수 있도록 누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저희도 포함해서요.”

     오이데 슌지의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슌지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농구부에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고요.”

     방청석 한쪽에서 누군가가 봄날의 새가 지저귀듯 웃었다.


    p.663





     “본 법정은 피고인 오이데 슌지 군에게 무죄 평결을 내립니다.”

     8월 20일, 오후 여섯시 십일분.

     “이것으로 교내재판을 폐정합니다.”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 높게 의사봉이 땅 울렸다.


     후지노 료코의 눈앞으로 사람들이 흘러갔다.

     울고 있는 건 가시와기 고코다. 다쿠야의 어머니. 남편과 다쿠야의 형, 남겨진 또 한 명의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법정을 나갔다.

     방청석 한가운데는 모기 에쓰오가 도전적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료코의 시선이 그에게서 멈추자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끝났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이데 슌지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앉아있는 간바라 가즈히코에게 돌아서더니 난데없이 멱살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주위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가운데 슌지는 가즈히코를 밀치더니 그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몇 번씩 문질러 깨끗이 닦아내고는 불쑥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만 흔들렸다. 오이데 슌지의 새빨간 얼굴—그 뺨이 젖은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슌지는 줄곧 울음을 참아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노다 겐이치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악수를 마치자 슌지는 고개를 돌리고 물러났다. 어머니가 그 뒤를 따르면서 변호인과 변호인 조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간바라와 노다에게 다가가는 저 양복 입은 남자는 누굴까. 아아, 곤노 변호사다. 가즈히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겐이치의 어깨도 두드렸다. 그리고 뭐라 말을 걸었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곤노 변호사는 웃는 얼굴이었다. 다시 가즈히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러뜨리듯이 쓰다듬었다. 

     또 한 사람,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료코가 모르는 얼굴이다. 아, 가슴에서 변호사 배지가 반짝거린다.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고 머리칼은 반백이다. 웃는 낯으로 양팔을 펼쳐 두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제 자식을 끌어안듯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곧 쑥스러운 듯 떨어져 머리를 긁적이고는 곤노 변호사와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료코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을 수없이 깜박거리며 앞에서 흘러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즈미가 팔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고로가 뭐라고 말했다. 누구랑 얘기하는 거지? 어, 가와노 탐정 아저씨잖아. 오늘도 오셨네. 뭐야, 저렇게 기뻐하는 표정을 다 짓고.

     우리가 졌는데.


    p.664–666





    변호인 측이 법정을 떠났다. 재판은 끝났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조토 3중학교를 떠나간다. 그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많은 것을 잃고, 상처를 받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시작해야 할 그의 인생으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서며 료코 쪽을 보았다.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말은 아무것도.

     사과했다.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후지노의 승리야.

     하지만 너도 지진 않았어. 료코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시야에서 간바라 가즈히코의 모습이 사라졌다.

     료코는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을 법정의 공기를 가슴 가득 빨아들였다.

     그리고 토해냈다. 재판은 끝났다.

     이제 곧 여름도 끝난다.


    p.667





    2010년 봄

     “뭐든 얘기해드릴 수 있어요.” 겐이치가 말했다. “어떤 얘기든.”

     겐이치가 우에노 교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교장이 살짝 눈이 부신 표정을 지었다.

     “그 말만으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네요.”

     겐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재판이 끝나고 저희는.”

     가장 적당한 말을 찾으며 겐이치는 교장실 창에 비쳐드는 봄 햇살로 눈을 돌렸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각자 가는 길은 다르지만, 지금도 친구다.

     그리고 노다 겐이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긴 여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친구들과의 발자취를.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나는 조토 제3중학교로 돌아왔다.

     이제 그 여름은 아득하다.


    p.674–675



    ->너무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였어요..................... 





  • 3.5
    스릴러
    2022-11-07

    인스티튜트

    The Institute
    3.5
    감상일 2022-11-07
    국가 미국
    장르 스릴러
    감독/작가 스티븐 킹/이은선(역)
    키워드 초능력, 성장

    리뷰

    필사/ 인스티튜트



    스티븐 킹 장편소설

    이은선 옮김

    2020년 7월 29일 1판 1쇄


    위기를 극복하며 자라나는 아이들과 좋은 어른의 교감이란건 언제봐도 좋을수밖에

    좋았던 구절

    인스티튜트1




    벌써 늦은 오후였기 때문에 팀은 모텔을 찾아서 하룻밤 쉬었다 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분명 또다시 싸구려 숙소겠지만. 밖에서 자다가 모기 떼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거나 어느 농가의 헛간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때문에 그는 듀프레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엄청난 사건들도 경첩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p.26




    수하물의 대부분은 송장에 적힌 목적지가 월밍턴이었지만 두 개(이런저런 소형 가전제품과 잡동사니인데, 루크가 그 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배달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듀프레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프로미스 소형기기 판매 및 수리 센터였다. 9956호는 일주일에 세 번 그 마을에 정차했다.


    엄청난 사건들도 경첩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p.442


    ->사실 1권은 그냥 그래서 중간에 하차할까 했는데 이 수미상관 연출이 좋아서 2권까지 계속 달렸음ㅋㅋ




    *



    인스티튜트 2




    “당신이 이 계획에 동조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당신이 애초에 이 일에 끼어든 이유 자체가 나한테는 미스터리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지 그래?”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4개월의 수습 기간 동안 선배 경관이 맨 처음 가르친 것 중 하나가 심문은 경찰이 범인에게 하는 거라는 점이었다. 범인에게 심문을 허락하면 절대 안 됐다.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얘기를 한들 눈곱만큼이라도 멀쩡하게 들릴까 싶었다. 부자들이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이런 최신식 비행기를 그가 타고 있는 것이 사실은 우연이라는 얘기? 옛날 옛적에 뉴욕으로 출발 예정이었던, 이보다 훨씬 평범한 비행기에서 어떤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현금과 호텔 숙박권을 받고 자기 자리를 양보한 적 있었다는 얘기? 그 한 번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는 얘기? 아니면 그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납치당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전신적인 능력을 착취당할 뻔했다가 지금은 잠이 든 아이를 구하라고 우주의 체스 선수가 그를 듀프레이로 옮긴 거라고? 만약 그렇다면 존 보안관, 태그 패러데이, 조지 버켓, 프랭크 포터, 빌 위클로는 뭐가 되는 걸까? 위대한 게임에서 희생당한 폰? 그는 어떤 말일까? 나이트라고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도 또 다른 폰일 가능성이 컸다. 

    “진통제 안 먹어도 되겠어요?”

    그는 물었다.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군그래?”

    “네, 없습니다.”

    팀은 고개를 돌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과 그 아래에서 우물 바닥의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몇 개 안 되는 불빛을 내다보았다.


    p.343 - 344





    “그래, 가라.”

    루크는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팀은 그냥 보내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루크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아이가 몸을 돌리자 끌어안았다. 팀은 니키도 안아 준 적 있었지만 아니, 아이들이 가끔 나쁜 꿈을 꾸고 자다가 깨면 모두 안아 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적어도 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는 루크에게 너는 용감한 아이라고, 어쩌면 모험소설 속 주인공 말고 현실세계에서 그보다 더 용감한 아이는 없을지 모른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강인하고 반듯한 아이라고, 부모님이 보았다면 자랑스러워 했을 거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고 어쩌면 말이 필요 없을지 몰랐다. 텔레파시도. 

    가끔은 포옹이 텔레파시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p.436 - 437


    ->"어쩌면 말이 필요 없을지 몰랐다. 텔레파시도. 가끔은 포옹이 텔레파시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엔딩이 참 좋았다... 

    ->발췌한 내용 중에는 없는데 소설 중간에 스치듯 한국의 한 도시명이 언급되는 부분도 있었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도 아니고 외국에선 모를법한 어떤... 창평? 뭐 이런 계열의 도시였는데 되게 신기했음. 스티븐킹 소설에 안유명한 한국 도시가 언급되고 지나간다니ㅋㅋㅋ






  • 5
    드라마, 로맨스
    2023-10-20

    아킬레우스의 노래

    The Song of Achilles
    5
    감상일 2023-10-20
    국가 미국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작가 매들린 밀러/이은선(역)
    키워드 그리스 로마 신화

    리뷰

    필사/ 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이은선 옮김

    2018년 3월 26일 초판 1쇄 발행


    번역을 통해서도 절절하게 전해지는 문장력이 너무 아름다워... 사실 첫 문단보고 반해서 집어온거라 로맨스 장르인것도 몰랐다가 둘의 사랑이 너무 먹먹하고 간질간질해서 심장뜯으면서 봤음

    그리고 매들린 밀러가 묘사하는 인외가 너무 좋아 압도적이고 아름답고 다른 차원에 사는 것 같은 분위기 이게 신이지bbb

    좋았던 구절

    — 


    그는 결혼식 전날까지 그녀가 살짝 모자란 여자라는 걸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식 당일까지 딸의 얼굴을 철저하게 베일로 감추었기 때문인데 나의 아버지는 토를 달지 않았다. 못생겼다 한들 여자 노예도 있고 남자 시종도 있었다. 마침내 베일을 벗겼을 때 어머니는 웃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모자란 여자라는 걸 알게 됐다. 세상에 웃는 신부는 없었다.


    p.9


    -> 첫 문단을 읽자마자 바로 덮고 빌려왔다. 결혼식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신선함과 동시에 그 시대 여성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콱 박히는 느낌이라... 그리고 문장의 리듬감? 흐름 같은게 너무 좋아




    “이제 네 차례야.”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할 수 없었다. 내 연주 대신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평생이고 할 수 없었다. “네가 해.” 내가 말했다.


    p.51




    “오래전부터 아킬레우스 너에게 여러 동무를 권했지만 너는 번번이 거절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

    나도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왕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구제하러 나선 걸까? 펠레우스와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놀랍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그 하나 뿐이었다.

    “놀랍다.” 펠레우스는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네.” 나는 추가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아킬레우스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p.53-54




    창 밖으로 보았던 매.

    앞니가 삐딱했던 아이.

    저녁 식사.

    같이 수영이나 놀이나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감정이 찾아왔다. 가슴속에서 점점 부풀어올라 나를 가득 채운다는 점에서는 거의 공포와 비슷했다. 순식간에 찾아온다는 점에서는 거의 눈물과 비슷했다. 하지만 공포나 눈물은 아니라서 그 둘이 무겁다면 이건 둥둥 떠다녔고, 그 둘이 칙칙하다면 이건 밝았다. 예전에도 만족감은 물수게비뜨기나 주사위 놀이나 몽상처럼 나 혼자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찰나처럼 맛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뭔가가 있다는데서 느낀 만족감이었다기보다 뭔가가 없다는 데서, 두려움을 벗어났다는 데서 느낀 만족감이었다. 일단 근처에 아버지나 다른 아이들이 없어야 했다.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거나 아프지도 않아야 했다. 

    이 감정은 달랐다. 나는 볼이 아프고 머리 가죽이 따끔거려서 이러다 떨어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혓바닥은 자유로움에 들떠서 내 통제 범위를 이탈했다. 나는 그에게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 늘어놓았다. 말이 너무 많은 건 아니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너무 마른 건 아닌지, 너무 느린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 나는 그에게 물수제비 뜨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는 내게 나무 깎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에도 온 몸의 모든 신경을 느낄 수 있었다.


    p.68-69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다.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도 더 컸다. 까만 머리는 풀어서 등뒤로 늘어뜨렸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살결은 달빛을 흡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믿기지 않을 만큼 창백했다. 그녀가 워낙 가까이 있어서 짙은 밤색 꿀 냄새와 섞인 바다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감히 쉴 수가 없었다. 

    “네가 파트로클로스로구나.” 나는 거칠고 귀에 거슬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파도에 돌이 갈리는 소리가 아니라 낭랑한 종소리일 줄 알았던 것이다.

    “네, 여신님.” 

    혐오의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녀의 눈은 인간과 달랐다. 가운데까지 까말고 금가루가 박혀있었다. 나는 차마 그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신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내 뺨에 닿는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지만 전혀 따뜻하지 않고 심해처럼 냉기가 돌았다. 알겠느냐? 그는 그녀가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네.”

    “좋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혼잣말처럼 무심하게 덧붙였다. 

    “너는 금새 죽을 거다.”

    그녀가 몸을 돌려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자 뒤로 잔물결 하나 남지 않았다.


    p.74-75




    잠시 후 아킬레우스가 리라를 뜯었고 케이론과 나는 그의 연주를 들었다. 어머니의 리라였다. 그가 여기까지 들고 온 것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산에서 보낸 첫날에 그가 리라를 보여줬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리라랑 헤어지기 싫어서 하마터면 눌러앉을 뻔했는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를 어디든 따라다니게 만들 방법을 알았네.”

    펠리온의 산등성이 아래로 해가 저물었고 우리는 행복했다.


    p.113




    “케이론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테티스가 하얀 피부와 까만 머리를 번개처럼 환히 빛내며 공터 끝머리에 서 있었다. 몸에 달라붙은 드레스가 생선 비늘처럼 어른거렸다. 내 숨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될 텐데.” 그녀가 말했다. 삐죽삐죽한 바위에 선체가 긁히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오자 그녀에게 밟힌 풀들이 시드는 듯했다. 그녀는 바다의 님프였으니 육지의 생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p.115


    -> "그녀가 앞으로 걸어오자 그녀에게 밟힌 풀들이 시드는 듯했다. 그녀는 바다의 님프였으니 육지의 생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진짜 소름끼치게 좋음 매들린 밀러가 묘사하는 인외가 너무좋아




    “저는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케이론의 까만 눈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너는 전사로 이름을 날릴 일은 없을거다. 내 말이 충격적으로 느껴지느냐?”

    그의 말투는 담담했고 덕분에 아픔이 덜했다. 

    “아뇨.”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p. 120-121




    “후회해?” 그가 단숨에 물었다. 

    “아니.” 내가 말했다.

    “나도.”

    정적이 흘렀고 나는 축축해진 돗짚자리나 땀범벅인 내 몸이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금색이 점점이 박힌 그의 초록색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 안에서 부풀어오른 확신에 목이 메었다.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다. 그가 날 내치지 않는 한 영원히 이렇게 있을 테다.

    그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있었다면 말로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그 진실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단어가 없었다.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가느다랗고 꽃잎 모양으로 혈관이 흐르며, 튼튼하고 빠르고 절대 틀리는 법이 없는 그의 손가락은 내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파트로클로스.” 그가 말했다. 전부터 그가 나보다 말주변이 좋았다.


    p.134-135




    어쩌면 그렇게 순진하냐고 나무라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는 남의 말을 너무 쉽게 믿었다. 살아오면서 두려워하거나 의심 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와의 우정이 싹트기 전에 그것 때문에 그를 증오하다시피 했는데 꺼져 있던 불씨가 내 안에서 되살아나서 불타오르려고 했다. 누구라도 테티스의 속셈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었을까. 가시 돋친 말들이 입안에서 따끔거렸다.

    그런데 그 말들을 내뱉으려 해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수치심으로 볼이 벌게졌고 눈 밑에 그늘이 졌다. 남을 잘 믿는 성격은 손이나 경이로운 발처럼 그를 이루는 일부였다. 그리고 나는 상처를 받긴 했지만 그런 성격이 사라져서 그가 남들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지내는 모습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p.176-177




    “그것 때문에 너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다.”

    “갈 테면 가라지.” 그는 고집스럽게 턱을 내밀었다. “그런 걸로 나의 명예가 흔들리도록 내버려둔다면 사람들이 멍청한 거야.”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그는 봄을 맞은 나뭇잎처럼 푸른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파트로클로스. 그들에게 양보할 만큼 했잖아. 이건 양보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p.229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가 잠이 들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너랑이지. 너랑 아이를 갖고 싶은 거지.” 

    나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일어나서 앉자 덮었던 담요가 가슴에서 떨어졌다. “지금 임신했어?” 그가 물었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었던 긴장한 말투였다.

    “아니.” 내가 말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빛을 이리저리 살폈다. 

    “너는 그러고 싶어?” 그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힘들어하는 표정이 느껴졌다. 질투심은 그에게 낯선 감정,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상처를 받았는데 그걸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 내가 문득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괜찮아.” 내가 말했다.

    안도하는 그의 표정이 나를 달콤하게 채웠다.


    p.343




    마침내 그가 말을 꺼낸다. 졌다는 듯이 지친 목소리다. 나에게 화를 내는 방법을 자기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불이 붙지 않는 축축한 나무와도 같다. 


    p.375-376




    파트로클로스. 위에서 노랫가락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까만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남자가 화살통과 활을 대충 가슴에 걸고 일광욕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벽에 기대고 서 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살짝 미끄러지고 그 바람에 바위에 무릎을 긁힌다. 그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반질반질한 피부와 깎아놓은 듯한 얼굴이 초인간적인 광채로 빛난다. 까만 눈. 아폴론이다

    그는 내가 알아봐주기만을 바랐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p.421-422


    -> 매들린 밀러가 묘사하는 인외가 너무좋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