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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드라마
    2024-05-08

    불안한 사람들

    Anxious People
    5
    감상일 2024-05-08
    국가 스웨덴
    장르 드라마
    감독/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이은선(역)
    키워드 군상극

    불안한 사람들

    2021년 5월 14일 초판 1쇄 발행

    (리뷰 추가)

    좋아하는 구절 13개
    이건 여러 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지 잊어버린 사람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인간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려움이 가중된다고 말이다.
    요즘은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많다. 취직도 해야 하고 살 집도 마련해야 하며 가정도 일구고 세금도 내고 깨끗한 속옷도 챙겨야 하고 빌어먹을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외워야 한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난장판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간다. 세상이 시속 32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뱅글뱅글 관통하는 동안 우리는 없어진 무수한 양말처럼 그 표면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우리의 심장은 비누와 같아서 손에 잘 쥐어지지 않는다. 긴장의 끊을 놓는 순간 금세 표류하고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받는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직업과 결혼생활과 아이들과 기타 모든 분야에서 ‘척’하는 법을 터득한다. 정상인 척, 제법 교양 있는 척, ‘원리금 균등분할상환’과 ‘물가상승률’이 뭔지 아는 척한다.



    우리는 예전에 열대어를 키우려고 했다가 깡그리 죽인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열대어에 대해서만큼이나 없기 때문에 엄청난 책임감으로 매일 아침 벌벌 떤다. 계획도 없고 그저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가끔은 껍데기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슴이 정말 아플 때도 있다. 공가금도 내야 하고 어른도 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지독히 높은 일이라서 겁에 질릴 때도 있다.
    모든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는 누구나 어떻게 하면 계속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다. 우리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졌던 짓들을 가끔 저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딱 하나의 지독하게 한심한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p.15—17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뭔가 하면 은행 강도가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은행 강도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은 없다. 어른이 되는 것이 끔찍한 이유는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앞으로는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공과금을 납부하고, 치실을 쓰고 회의에 늦지 않고, 줄을 서고 서식을 작성하고, 케이블과 씨름하고 가구를 졸비하고,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고 전화 요금을 내고 커피 머신을 끄고 아이들 수영 수업을 잊지 않고 신청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상이 우리 머리 위에 “잊어버리지 마!”와 “잘 챙겨!”로 이루어진 폭탄을 새롭게 투하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다른 폭탄이 위에서 쏟아질 것이기에, 우리는 여유롭게 생각하거나 숨을 돌리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그 산더미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회사나 학부모 간담회나 길거리에서 가끔 주의를 두리번거리다가, 남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들은 여러 가지를 감당할 여유가 되고 여러 가지를 잘 다룰 줄 알며 그러고도 에너지가 남아서 더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의 집 아이들은 모두 수영을 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진작 우리를 말렸어야 했다.

    p.74—75
    …하지만 어떤 사람이 무기를 들고 쭈뼛쭈뼛 들어가 아주 구체적으로 정확히 6천 5백 크로나를 요구한다면 이면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러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p.78
    그들은 거의 항상 뒤늦게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는데, 다리를 건너 반대편 버스 정거장까지 달려갈 때마다 딸들은 깔깔대며 웃는다. “큰사람이 온다! 큰사슴이 온다!” 은행을 털려고 한 부모의 다리가 쌩뚱맞게 너무 길어서 달리면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그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비율을 측정하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우리를 항상 아래에서, 그러니까 가장 안 좋은 각도에서 올려다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를 골탕 먹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약삭빠른 꼬마 괴물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모조리 건드릴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항상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용서한다.
    아이가 생겼을 때 가장 신기한 부분이 그것이다. 은행 강도인 부모뿐 아니라 모든 부모가 그렇다. 그 모든 면모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의 사랑을 받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이를 한참 먹은 뒤에도 자기 부모가 완전히 똑똑하고 엄청나게 재밌는 불사신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어쩌면 거기에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가 특정 연령까지 당신을 조건 없이, 대책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딱 하나, 당신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영리한 행동이다.
    은행 강도가 된 부모는 딸들을 절대 진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당사자들이 그 이름을 가장 쓰기 싫어 하는 것과 같은 부분들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 전에는 절대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지어서 붙인다. 사랑하면 우리만의 단어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 강도가 된 부모는 각각 6년과 8년 전, 아직 엄마 배속에 있었을 때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발버둥 쳤는지를 근거로 딸들을 부른다. 한 아이는 배 안에서 계속 점프하는 느낌이었고 한 아이는 항상 나무를 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아이는 개구리, 한 아이는 원숭이다. 그리고 큰사슴은 그 둘을 위해 무엇이든 못 할 게 없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도. 어쩌면 당신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바보 같은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당신의 삶에도 있을지 모른다.

    p.90—91
    그녀는 병원에서 곧장 다리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그녀를 끌어내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 발 내디뎠을까, 뒤로 물러났을까? 그래서 그녀는 이후로 날마다 뛰어내린 남자와 자신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걸 발판 삼아 직업과 경력과 모든 인생을 선택했다. 그녀는 심리학자가 되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 발을 저쪽으로 내밀고 난간에 서 있는 것처럼 괴로움에 뭄부림을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겪어봤어요. 나는 거기서 무사히 내려오는 방법을 알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녀가 뛰어내리고 싶었던 이유와,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서 부족하다고 느낀 점들이 어쩌다 한 번씩 불쑥 떠오르곤 했다. 저녁 식탁에서 느낀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대처하는 법, 거기서 빠져나오는 법, 내려오는 법을 찾았다. 불안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다.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거의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잘하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자부심을 선사하고 있을까? 나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일을 잘할까? 마음이 넓고 배려심이 있을까? 괜찮은 녀석일까?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좋은 부모였을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속으로는 그렇다.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문제가 있다면 바보들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바보라서 친절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디아에게는 그것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과업이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p.155—156
    …사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남자와 나디아의 차이점이 뭔지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고 싶지 않기는 해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긴 해도.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는 해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진면모를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라는 아직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전부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일지 모른다. 예컨대 이 이야기도 은행 강도나 아파트 오픈 하우스나 인질극이 주제가 아닐지 모른다. 심지어 바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다리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p.158
    두 아이 모두 아직 같이 살던 시절, 모두들 아직 어지간히 행복했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에 야크는 어머니에게 살릴 수도 없는 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킬 때 그 옆에 앉아 있는걸 무슨 수로 견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 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야크는 누나를 돕지 못했다. 다리 위로 올라간 남자를 구하지 못했다.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뛰어내린다. 남은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사는 일을 하러 출근하고 경찰도 마찬가지다.

    p.292—293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가 진실이 복잡하길 바라는 이유는 먼저 간파했을 때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다리와 바보들과 인질극과 오픈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여러 편의 사랑 이야기다.

    p.309
    사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손을 주무르며 한문 개수를 센다. 책상은 좁고, 둘 사이에 책상이 없었다면 두 여자는 서로 그렇게 가까이 앉아 있어 불편했을지 모른다. 가끔 우리에게는 거리가 아니라 그냥 장벽이 필요할 때도 있다. 사라의 움직임은 신중하고 나디아는 조심스럽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심리 상담사는 용기를 내서 말문을 연다.
    “처음 만났을 때 저더러 공황발작이 어떤 건지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거 기억하세요? 제가 제대로 대답을 못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좀 더 훌륭한 답을 알고 있나요?” 사라는 묻는다.
    심리 상담사는 고개를 젓는다.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잠시 후에 나디아는 심리 상담사가 아닌 개인으로서, 심리학 수업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대문 내용이 아니라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하지만 그거 아세요? 공황발작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도움이 되더라고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이 아침에 엉망인 모습으로 출근해 ‘공황발작이 일어났어요’라고 했을 때보다 ‘술이 안깨요’라고 했을 때 동료와 상사에게 더 많은 동정표를 얻겠지만요.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고 있어요, 대다수가 그게 뭔지 모를 뿐이죠. 몇 달 동안 숨이 안 쉬어져서 폐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게 다 뭔가가…… 고장 났다는 걸 인정하기가 더럽게 어려워서 생기는 현상이에요. 영혼으로 느껴지는 고통, 혈관 속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납덩이, 가슴을 누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돌덩이. 뇌에서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죠, 조만간 죽게 생겼다고. 하지만 폐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사라. 우리는 죽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그 말이 둘 사이를 맴돌며 망막 위에서 보이지 않는 춤을 추다가 정적이 내려앉는다. 우리는 죽지 않아요. 우리는 죽지 않아요. 우리는 죽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p.456—458
    …사라는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다무는데, 눈 아래 피부가 마침내 무너진다. 그녀의 공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방울 모양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향해 떨어진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꺼낸다. 심리 상담사는 머뭇거리며 그걸 집는다. 사라는 이 편지 때문에 여길 찾아왔다고, 맨 처음에 온 그날이 그 남자가 뛰어내릴 지 딱 10년째 되던 날이었다고 속삭이고 싶다. 그가 뭐라고 썼는지 큰 소리로 읽어줄 사람, 그녀의 가슴에 불이 나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사라는 다리에 대해, 나디아에 대해, 그 남자아이가 달려가 그녀를 구하는 모습을 본 일에 대해 모두 속삭이고 싶다. 그 뒤로 날마다 어떤 식으로 사람들 간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는지도. 하지만 그녀가 간신히 꺼낸 말은 이게 전부다. “나디아…… 당신과…… 나는……”

    나디아는 책상 저편에 앉아있는 연상의 여자를 끌어안고 싶지만, 안아주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라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심리 상담사는 새끼손가락을 봉투 뒷면의 안으로 넣어서 봉투를 연다. 10년 된 자필 쪽지를 꺼낸다. 적힌 단어는 네 개다.

    p.458—459
    사라는 난간 앞에 서 있다. 몸을 숙여 난간 너머를 내다본다. 딱 1초라는 찰나의 순간 동안 그녀가 뛰어내리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누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녀의 모든 사연과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세상에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끝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뛰어내리고 그럴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잠시 후 그녀가 손을 놓는다.

    바로 위에 서 있는데도 알고 보니 거리가 제법 멀다. 수면을 때리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가볍게 긁히는 소리, 종이를 움켜쥐는 바람, 퍼덕이고 구겨지며 수면을 가르고 점점 멀어져가는 편지. 도어매트에서 맨 처음 그 편지를 주운 뒤로 봉투를 만 번쯤 만지작거렸던 손 끝이 저항을 포기하고 그 나름의 영원을 향해 편지를 띄워 보낸다.

    10년 전에 그 편지를 보낸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녀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적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길지도 않은 딱 네 단어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네 단어였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었어요.”

    p.460—461
    …아이가 특정 나이까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 부모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당신을 평생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 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명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

    p.473
    진실은 무엇일까? 이 모든 사건의 진실. 진실은 이것이 여러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정말이다. 어른이 되고 서로 사랑하며 USB 단자를 어떻게 꽂는지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꼭 불잡을 수 있는 것, 싸워서 지킬 것, 손꼽아 기다릴 것을 찾는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모두가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대다수는 타인으로 남고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지, 당신의 삶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모르고 지낸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인파 속에서 허둥지둥 엇갈려 지나갔지만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당신이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가 내가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를 스친 순간 서로 멀어졌을지 모른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 번 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p.478–479
  • 5
    추리, 미스터리
    2022-07-03

    솔로몬의 위증

    ソロモンの偽証
    5
    감상일 2022-07-03
    국가 일본
    장르 추리, 미스터리
    감독/작가 미야베 미유키/이영미(역)
    키워드 사회파 추리물, 군상극, 성장

    솔로몬의 위증

    2013년 6월 12일 초판 1쇄 발행

    내가 좋아하는 소재: 사회파 추리, 군상극, 사춘기 시기의 풋풋하고 불안한 아이들과 성장 드라마를 다 말아주는 종합 선물 세트

    내 안의 미미여사 랭킹은 영원히, 압도적으로 모방범만이 1위 자리를 지킬 줄 알았는데... 솔로몬의 위증이 모방범 아래에 만만치 않은 2위로 등록됨
    사회파 추리소설 기준으로는 여전히 모방범이 1위지만... 약간 만화적인 캐릭터 구성과 후반부의 벅차오르는 감동은 솔로몬의 위증이 더 커서 진짜 그냥 둘이 다른맛으로 재밌고 이 맛을 못잊어서 영원히 신작을 외치며 울게 돼  
    미미여사님 제발 시대극말고 현대장편추리물 계속 써주시면 안돼요?


    좋아하는 구절 15개 (코멘트 4개)
    1부 사건


    —그런데 알고 보면 휴가철이나 크리스마스, 명절 연휴 같은 때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대요. 우울하거나 불우한 사람에게는 자기만 빼고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게 괴롭겠죠.

    p.10–11
    “잘됐다, 주리짱.”
    그 순간 분노의 절규가 주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올랐다. 거센 바람 소리와도 비슷한 그것이 주리를 포악스럽게 뒤흔들었다. 열네살 소녀의 가녀린 몸은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잘되긴 뭐가 잘돼! 잘된 건 하나도 없어! 대체 넌 왜 그걸 몰라?
    사실 나는 이런 것과 상관없이 살고 싶었다. 이런 심정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로 알게 된 것이다. 억지로 이런 일을 강요당한 것이다.
    주리는 더는 그 분노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요새는 마음속에서 쉴새없이 날뛰는 분노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이 투서를 쓰고 여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왜 분노는 편지가 우체통 바닥으로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
    핵심이 빠져 너덜너덜해진 찌꺼기 같은 목소리로 주리는 말했다. “응, 돌아가자.”

    p.208–209
    하지만 지금은 신변의 안전을 지키는 게 먼저다. 이제 두 번 다시 등을 걷어차이거나 남자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처박히지 않도록. 아래로 떨어지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아파트 계단 난간에 손을 얹고 한 시간씩 서있거나, 면도칼을 쥐고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울지 않도록.
    그리고 나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세 사람에게 합당한 보복을 해주겠다.
    그러기 위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장을 고심하고, 자와 볼펜을 놀려 완성해낸 이 고발장.
    이것은 올바른 일이다.
    왜냐하면 난 봤으니까. 정말로 봤으니까. 그래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미야케 주리의 입술이 현실세계의 그 어떤 자로도 그을 수 없는 완벽한 직선을 그렸다. 그것은 정의와 복수 두 점 사이를 최단거리로 연결한 선, 주리만이 시작점과 끝점을 아는 직선이었다.

    고발장

    고토 제3중학교
    2학년 A반 가시와기 다쿠야는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살해당했습니다
    학교 옥상에서 떠밀렸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그날
    저는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가시와기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를 밀어뜨린 사람은
    2학년 D반의 오이데 슌지입니다
    하시다 유타로와 이구치 미쓰루도 거들었습니다
    세 사람은 웃으면서 도망쳤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사건을 조사해주십시오
    이대로는 가시와기가
    너무 불쌍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경찰에 알려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p.220–221
    하 ㅁㅊ주리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맨첨에 읽을땐 헐대박ㄷㄷ대존잼 이러면서 후루룩 읽던 파트가 나중에 너무 아픈손가락 돼서 내가진짜ㅠㅠㅠㅠㅠ
    2부 결의


    “사건에 대한 흥미라고 하면 안 될까요?”
    “거짓말 마. 넌 그런 구경꾼이 아니야.”
    “해결하고 싶은 야심, 혹은 공명심?”
    가즈히코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타오 선생이 피식 웃었다.
    “그런게 있긴 하냐? 그 다음은?”
    “멋지잖아요?”
    “누구한테 보여주고요. 누구야? 역시 후지노?”
    “왜요, 후지노 귀엽잖아요.”
    기타오 선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정말 그애가 마음에 없나보구나. 그런 와 닿지도 않는 소리를 잘도 하는 걸 보니.”
    그 말에는 겐이치도 동의할 수 없었다. “후지노가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야. 물론 예쁘지. 크면 더 예뻐질 테고. 하지만 귀엽진 않아. 귀염성이 없어. 귀여움으로 어필하는 여자애는 아니야.”
    아아, 그런 뜻이라면 알겠어요. 가즈히코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불끈 쥔 겐이치의 주먹이 갈 곳을 잃었다. 난 후지노가 귀여운데.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용감하다. 용기를 쥐어짜내는 그애의 모습이 귀엽다.

    p.321–322
    ^_____^ 좋아하는 여자애의 모든 면모가 다 좋아서 난 귀여운데. 하는 풋풋한 첫사랑이 너무 귀여워... 그치만 선생님은 애들앞에서 뭔말을 하시는거죠
    —정말 하는구나.
    겐이치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한편으로 왠지 차가운 긴장감도 느껴졌다. 체육관이 법정이 된다. 그곳에 오이데 슌지가 피고로 선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발걸음을 늦추며 불쑥 말했다.
    “만약 유죄 평결이 나오면 우리 피고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한번 생각해둬야 하지 않아?”
    가즈히코가 걸음을 멈췄다. 한낮의 열을 머금었다가 후텁지근한 기운을 피워올리는 아스팔트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겐이치는 그를 앞지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우리끼리 생각하는 것보다.”
    가즈히코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커다란 태양은 두 사람의 등뒤에 있는데도 눈이 부신듯이 실눈을 떴다.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겐이치의 집 앞 길가에 오이데 슌지가 서 있었다. 색상도 무늬도 화려한 티셔츠에 후줄근한 청바지. 비치샌들을 꿰신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상반신을 흐느적거리며 딴 데를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밑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해질녘이라 그림자는 이미 옅어졌지만, 오히려 슌지는 그 그림자에 모든 힘을 빼앗긴 듯 훨씬 연약해 보였다.
    “기껏—찾아와줬더니만.”
    가즈히코는 말이 없었다. 겐이치도 마찬가지였다.
    오이데 슌지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엉덩이에 손을 문질렀다. 얼굴은 여전히 딴 데를 보고 있다.
    “나는.”
    가즈히코는 기다렸다. 겐이치도 마찬가지였다.
    “내 결백을 입증할 거야.”
    내 결백을 입증할 거야. 아마 오이데 슌지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게 입 밖에 낸 말이리라.
    “그러기로 결심했어.”
    순지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반짝거렸다. 이마도 빰도 턱 끝도. 물론 이런 길가에 오래 서 있으면 땀범벅이 되게 마련이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 거야.”
    내 재판을.
    “그러니까 부, 부, 부탁해.”
    고개를 숙이고, 불끈 쥔 주먹을 코에 대고, 오이데 슌지가 말했다.
    “응.”
    맥빠질만큼 순순히, 간단하게, 간바라 가즈히코가 대답했다.
    “잘 알았어.”
    가즈히코가 먼저 오른손을 내밀고 슌지가 머뭇머뭇 그 손을 잡았다. 조수 노다 겐이치는 석양빛 아래 악수를 나누는 변호인과 피고인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싸우자.

    p.644–645
    “—너무해.”
    소인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뒷면에 휘갈긴 전단지는 두말 할 것 없이 우편함에 직접 넣고 간 것이리라.
    “엄마가 숨겨놨어.”
    “그랬구나.”
    주리의 눈이 새빨갰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오늘 발견했어.”
    숨길거면 차라리 버리지. 료코는 버럭 화가 났다. 저 어머니 성격으로 보아 증거로 보관했다가 나중에 고소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걸 보고 울었구나.”
    계속 울었구나, 미야케.
    “도망치면.”
    주리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거짓말쟁이가, 돼버려.”
    그러니 재판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어.”
    나도 봤어, 라고 말했다.
    “마쓰코랑 같이, 나도 봤다고.”
    자꾸 뭐가 목에 걸리는 듯 주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무서워서, 말 못 했어. 그렇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정말로, 있었어. 정말로, 봤어.”
    듣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있었어. 정말로 봤어. 그 고백이 료코를 때리고, 료코를 뒤흔들었다.
    검사로서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던 것을 료코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픈 심정은 미야케 주리도 마찬가지다. 오이데 슌지나 모리우치 선생과 마찬가지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라고.
    사건 초반부터 주리가 고발장을 썼다는 소문만 나돈 게 아니었다. 주리는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그 두 가지는 늘 한 세트였다. 엉터리 고발장을 꾸며낸 거짓말쟁이 미야케 주리.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항변할 기회가, 주리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회야말로 교내재판 법정에서 주어져야 한다.
    “—목소리가, 나오면, 직접 말할 수 있어.”
    힘겹게 말하는 주리에게 후지노 료코는 크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며 힘을 잃었다.
    “후지노, 넌 , 날 안 믿잖아.”
    주리가 가까스로 눈길을 들어 료코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날, 믿는다고.”
    료코는 목속의 피가 서서히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피가 가라앉고 그 자리로 따뜻한 피가 흘러들었다.
    그렇다, 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미야케를 믿는다고. 고발장 내용을 믿는다고.
    “미안해.”
    그 말 또한 피가 흘러나오듯 료코의 몸에서부터 새나왔다.
    “난 자신이 없었어—“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떻게하면 주리에게 전할 수 있을까.
    “미야케, 왜 목소리가 돌아왔을 것 같아?”
    주리가 의심쩍은 듯 실눈을 떴다.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료코는 흩어진 편지와 전단지를 집어들고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난당하는 게 분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되받아 치고 싶어져서 그래. 자기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어져서 그래.”
    그래, 맞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난 그걸 믿는다.
    “난 그 마음을 믿어. 처음에는 나도 확신하지 못했어. 내가 과연 검사같은 걸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어. 그렇지만 재판을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알게 됐어.”
    내가 서야 할 자리를. 눈을 두어야 할 곳을.
    진실은 지금까지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밝혀내야 한다.
    “나는 이 사건의 검사야. 그리고 널 믿어.”
    스테레오 오디오에서 아름다운 소프라노 독창이 울려퍼졌다.
    주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몸 전체를 울리는 놀라우리만큼 굵은 소리였다. 이거다. 이렇게 해서 주리는 목소리를 되찾았다. 공포를, 분노를, 절망을 쏟아내기 위해.
    긴 침묵을 깨고 주리가 내뱉은 비명을 받아줄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껏 아무도 하려 들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나, 후지노 료코다.

    p.663–665
    사랑해............... 윗 발췌본이랑 이거랑 둘 다 같은 감상임. 같은 진영에서 싸워야 하는 입장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던 아이들이 마음의 둑을 허물고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니 너무 아름다워..........
    3부 법정


    오늘 아침 소동을 가장 유쾌하게 넘긴 것은 이노우에 가족이었다. 다급하게 취재를 시작한 미디어 관계자들에게도 판사의 당당한 모습에 감탄하거나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모여든 참이었다.
    그들에게 맞선 것은 야스오의 아버지였다. 계속 울려대는 전화와 인터폰에 분통이 터진 그가 “내가 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마”라고 선언하자, 아내와 딸과 당사자인 아들이 만류했다.
    “아버지가 할 바엔 내가 하는 게 이치에 맞아.”
    야스오는 그렇게 주장했다가 수면 부족인 누나에게 꿀밤을 맞았다.
    결국 누나의 제안으로 택시를 집 앞까지 불러 가족이 다함께 등교했다. 사정을 모르는 운전기사는 놀라면서도 베테랑다운 능숙한 솜씨로 뒤따라오는 기자와 리포터를 따돌렸다.
    “수상이 된 기분이군.” 야스오의 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취재 열기가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어.”
    “취재 열기는 무슨.” 야스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나저나 오랜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네. 내 배에서 어떻게 야스오 같은 아이가 나왔나 신기했었는데. 야스오 너한테 내 유전자는 안 갔나보다. 전부 아빠 유전자야.”
    “그래서 머리가 좋다는 거야?”
    누나의 질문에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별나다는 거지.”
    “동의 못 해.”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말했다.

    p.421–422
    어린아이들 미성년자들, 일방적인 폭력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할 권리가 있다. 어떤 사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인이 주위에 알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저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료코는 다카기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만약 그때 엄마 구니코가 거세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발끈한 다카기 선생님도 나쁘지만 선생님에게 반항한 너도 나쁘다며 참으라고 했다면, 내신서에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되도록 원만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스이 노조무도 마찬가지다. 그애는 줄곧 부당한 인내를 강요당했다. 부모님이 그애를 위해 내린 결정일지라도 본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 배려는 잘못된 것이다. 합의했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건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의 주장이다.

    p.423–424
    “두번째는 이처럼 명쾌하지 못한 케이스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을 당한 상대나 혹은 그에 영향을 받은 불특정한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행했는데, 결과적으로 사람이 죽고 만 경우입니다. 이 ‘어쩌면 ㅇㅇ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의지를 ‘미필적 고의’라 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고 말았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p.458
    “고발장을 쓴 사람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다고 주장하며 피고인을 고발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변호인은 반복했다.
    “그 사람에게는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장난을 즐기는 피고인이라는 인간을, 장난으로 서슴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인간을, 장난으로 남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기를 즐기는 인간을 학교에서—조토 제3중학교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쫓아버릴 더없이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변호인이 물었다. 이 규탄이 형식적으로나마 질문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수사적인 물음을.
    “피고인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피고인을 함정에 빠뜨릴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피고인에게 상처받고 피고인을 원망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고발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즉, 고발장을 쓴 것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든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방청석이 술렁였다. 줄지어 앉아 있던 사람들의 물결이 허물어졌다. 뒤를 돌아본 료코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벌떡 일어섰다.
    미야케 주리다. 기절했는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널브러진 것이다.

    p.474–475
    교내재판 관련자들은 예기치 않게 주어진 휴일을 각각 다른방식으로 보내고 있었다.
    배심원장인 다케다 가즈토시는 집 근처 공원에 딱 하나 있는 낡은 농구 골대 아래서 아침부터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휴일의 텅 빈 파란 하늘에 여름 끝자락의 소나기 구름이 떠 있었다.

    p.500–502
    “그럼 다케다 배심원장에게 묻겠습니다. 평의 결과, 배심원단은 누가 가시와기 다쿠야 군을 상해했다는 결론을 냈습니까?”
    다케다 배심원장은 의연하게 얼굴을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가시와기 다쿠야 군입니다.”
    료코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판사가 “정숙!” 하고 소리쳤다.
    노다 겐이치는 떨고 있었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고개를 들어 넋을 놓고 키다리 배심원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건은 가시와기 다쿠야 군에 의한, 가시와기 다쿠야 군 살해사건 입니다. 저희는 가시와기 다쿠야 군이 미필적 고의의 살의에 의해 가시와기 다쿠야 군을 살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죽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리긴 아쉽다.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짓을 하면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얼어붙은 옥상 철조망 너머에서.
    “가시와기 군이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는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배심원장의 목소리가 차츰 안정을 찾았다.
    “좀더 일찍 가시와기 군의 갈등이 해소되도록, 고민이 덜어질 수 있도록 누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저희도 포함해서요.”
    오이데 슌지의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슌지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농구부에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고요.”
    방청석 한쪽에서 누군가가 봄날의 새가 지저귀듯 웃었다.

    p.663
    “본 법정은 피고인 오이데 슌지 군에게 무죄 평결을 내립니다.”
    8월 20일, 오후 여섯시 십일분.
    “이것으로 교내재판을 폐정합니다.”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 높게 의사봉이 땅 울렸다.
    후지노 료코의 눈앞으로 사람들이 흘러갔다.
    울고 있는 건 가시와기 고코다. 다쿠야의 어머니. 남편과 다쿠야의 형, 남겨진 또 한 명의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법정을 나갔다.
    방청석 한가운데는 모기 에쓰오가 도전적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료코의 시선이 그에게서 멈추자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끝났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이데 슌지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앉아있는 간바라 가즈히코에게 돌아서더니 난데없이 멱살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주위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가운데 슌지는 가즈히코를 밀치더니 그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몇 번씩 문질러 깨끗이 닦아내고는 불쑥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만 흔들렸다. 오이데 슌지의 새빨간 얼굴—그 뺨이 젖은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슌지는 줄곧 울음을 참아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노다 겐이치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악수를 마치자 슌지는 고개를 돌리고 물러났다. 어머니가 그 뒤를 따르면서 변호인과 변호인 조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간바라와 노다에게 다가가는 저 양복 입은 남자는 누굴까. 아아, 곤노 변호사다. 가즈히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겐이치의 어깨도 두드렸다. 그리고 뭐라 말을 걸었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곤노 변호사는 웃는 얼굴이었다. 다시 가즈히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러뜨리듯이 쓰다듬었다.
    또 한 사람,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료코가 모르는 얼굴이다. 아, 가슴에서 변호사 배지가 반짝거린다.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고 머리칼은 반백이다. 웃는 낯으로 양팔을 펼쳐 두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제 자식을 끌어안듯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곧 쑥스러운 듯 떨어져 머리를 긁적이고는 곤노 변호사와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료코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을 수없이 깜박거리며 앞에서 흘러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즈미가 팔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고로가 뭐라고 말했다. 누구랑 얘기하는 거지? 어, 가와노 탐정 아저씨잖아. 오늘도 오셨네. 뭐야, 저렇게 기뻐하는 표정을 다 짓고.
    우리가 졌는데.

    p.664–666
    변호인 측이 법정을 떠났다. 재판은 끝났다. 간바라 가즈히코는 조토 3중학교를 떠나간다. 그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많은 것을 잃고, 상처를 받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시작해야 할 그의 인생으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서며 료코 쪽을 보았다.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말은 아무것도.
    사과했다.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봐, 내 말이 맞지? 후지노의 승리야.
    하지만 너도 지진 않았어. 료코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시야에서 간바라 가즈히코의 모습이 사라졌다.
    료코는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을 법정의 공기를 가슴 가득 빨아들였다.
    그리고 토해냈다. 재판은 끝났다.
    이제 곧 여름도 끝난다.

    p.667
    2010년 봄



    “뭐든 얘기해드릴 수 있어요.” 겐이치가 말했다. “어떤 얘기든.”
    겐이치가 우에노 교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교장이 살짝 눈이 부신 표정을 지었다.
    “그 말만으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네요.”
    겐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재판이 끝나고 저희는.”
    가장 적당한 말을 찾으며 겐이치는 교장실 창에 비쳐드는 봄 햇살로 눈을 돌렸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각자 가는 길은 다르지만, 지금도 친구다.
    그리고 노다 겐이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긴 여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친구들과의 발자취를.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나는 조토 제3중학교로 돌아왔다.
    이제 그 여름은 아득하다.

    p.674–675
    너무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