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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SF
    2026-04-05

    천 개의 파랑

    4
    감상일 2026-04-05
    국가 한국
    장르 SF
    감독/작가 천선란
    키워드 감성 드라마, 로봇, 우정

    천 개의 파랑

    2020년 8월 19일 초판 1쇄 발행

    묘하게 붕 떠있는 분위기라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처음 읽을 때 보다 책갈피 찝어놓은 부분 디지털 필사하면서 되새김질 할 때가 더 좋더라
    그리고 지수-연재 관계가 우정이면서도 묘하게 덤덤남주와 왈가닥여주의 로맨스 도식이라 좀 웃기고 재밌음ㅋㅋ 아무래도 ~날 이렇게 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계열의 관계성은 클래식이죠
    좋았던 구절



    이제 내 다리는 투데이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투데이는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것이다.

    투데이는 며칠 전까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였고 나는 폐기를 앞둔 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투데이는 다시 주로를 달린다. 나는 떨어지고 있다. 땅에 닿으면 부서진다. 인간은 이런 예측을 본능적인 감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확한 수치와 계산에 의한 결괏값만을 산출한다. 내 미래에는 예측 오류란 없다. 나는 내가 여기 오게 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다.

    내 이름은 콜리다. 브로콜리의 색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p.10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빠르고 무엇이 느려도 된다는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궁금했으면서 왜 묻지 않았을까. 보경은 그 순간의 자신을 자주 탓했다. 그때 묻지 못한 죄로 그 말에 대한 궁금증은 영원히 미제로 남았다.


    p.164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p.168




    봐봐, 없지?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열심히 할 거야.

    뭐를?

    뭐든! 밥 먹는 거든, 약 먹는 거든, 운동하는 거든, 공부하는 거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열심히 하고 있을래. 그렇게 있다 보면 무슨 일이든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알겠어.

    뭐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걸 해볼게. 그리고 내가 나를 응원해볼게.


    p.187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 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산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p.189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p.204-205




    복희는 정정해야 했다. 관심이 없어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다. 어느 생명체의 일생을 전부 책임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생을 마감한 동물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것도 겁났다. 복희는 자신이 철저하게 겁쟁이였음을 수의사가 된 후에 인정했다. 이곳에 오는 보호자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는 자들의 자세.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으며 복희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p.246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p.278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화재가 난 빌딩 속에 있던 소방관을 기다리던 그 시간에 멈춰 있어. 반드시 살아서 나오리라 믿고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무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p.285-286




    지수는 단순하다. 3주 남짓 억지로 붙어 있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표정이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표정과 말이 달라 오류를 일으킬 때도 많았다. 그런 지수의 모습이 이상하거나 싫다는 건 아니었다. 연재가 짖지 못하는 표정이어서 신기해 오래도록 보는 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p.291




    콜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연재는 생각해본 적 없던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연재는 그 대화 탓에 그날 밤 잠들기 직전까지 바다에 빠진 지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했듯이 아홉 명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수를 가장 먼저 구할 거였다. 보경이 있었다면 보경을, 은혜가 있었다면 헤엄을 칠 수 없는 은혜를 가장 먼저 구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 번째네.

    연재는 누워서 세 번째나 네 번째가 될 만한 사람이 더 없는지 고민했다. 민주도 떠올랐지만 민주는 개헤엄을 쳐서라도 살아남을 사람 같았다. 다영과 지수 사이에서는 꽤 오래 고민했는데 불현듯 다영이 수영을 취미로 배운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세 번째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그랬다. 이 사실은 지수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으리라. 말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괜히 말해줬다가 평생 놀림을 받을 게 눈에 훤했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지수에게 자신은 과연 몇 번째일까.


    p.295-296




    “알겠어, 알겠어, 고마워 죽겠다고? 네 속마음으로 다 들었어.”

    지수는 이미 연재에게 고맙다는 말 듣기를 포기했으니 그걸로 고맙다는 말을 퉁쳐도 됐을 거였다. 지수도 더는 기다리지 않는 낌새였다. 하지만 연재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엉?”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려던 지수는 도로 손을 내리고 되물었다.

    “고마흐다고.”


    p.297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옆에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p.327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p.349




    나의 최후다. 엉덩이부터 상체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맑은 하늘이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p.354







    심사평 중


    이지용 건국대 학술연구교수


    … 다양한 소재와 설정,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잡지 못하고 파편화된 상태로 부유하는 모습들이 많았다. 소재를 차용하고 세계관을 설정한 작가조차도 그것을 충분히 신뢰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SF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경이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작가가 먼저 설정한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재와 설정을 그저 나열하게 되면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한계를 드러내지만, 결국 독자가 작가가 설정한 경이의 세계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결말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결망에서의 파급력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경이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세계 안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p.362


    #2026리뷰 #천선란 #SF
  • 5
    SF
    2023-12-20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5
    감상일 2023-12-20
    국가 영국
    장르 SF
    감독/작가 올더스 헉슬리/이덕형(역)
    키워드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

    1988년 8월 30일 1판 1쇄 발행

    원작 1932년


    처음 이 소설 영업 당했던게 모 탐조유투버의 다큐영상 덧글에 구독자가 인용한 문장이 너무 좋아서였는데... 결국 그 유투버 좀 이상해져서 구독 해제했지만 멋진 신세계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1932년에 나온 소설이 이렇게까지 현대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하다고?? 하는 놀라움에 이어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임에도 가장 인간다운 무언가를 찬양하고 자유를 외치는 서사라니 이러면 오타쿠 울죠

    나중에 읽게 된 조지 오웰 1984는 상대적으로 삭막한 플롯이라... 디스토피아 사제대결에선 갠취로 헉슬리 승

    좋았던 구절



    “린다!” 야만인은 애원하듯 소리쳤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그는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그에게 잊을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린다의 흐물흐물한 손을 힘껏 쥐었다. 이 추잡한 쾌락의 꿈으로부터, 이 천박하고 증오스러운 추억으로부터 이 현실의 세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강제로 끌어내고 싶었다 — 아연실색할 현재, 무서운 현실, 그러면서도 공포심을 재촉하는 긴박성 때문에 숭고하고 처절하도록 중대한 현재로 끌어내고 싶었다. 

    “린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어?”


    p.258–259




    “당신들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다움과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그러면 내가 가르쳐주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의 안뜰로 향한 창문을 열더니 약상자를 열고 소마 알약을 한 주먹씩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카키색의 군중들은 이 오만한 신성모독에 놀라움과 공포로 말을 잃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미쳤군.” 버나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속삭였다.

    “저들이 그를 죽일거야. 죽일거야.”

    군중들로부터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야만인을 향하여 무서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위협적인 물결이었다. 

    “포드 님, 그를 구해주소서!” 버나드는 기도하고 눈을 외면했다.

    “포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헬름홀츠 왓슨이 말하며 웃었다. 아니 웃음을 머금은 채 군중을 헤치며 뛰어들었다. 

    “자유! 자유!”

    야만인은 외치며 한 손으로는 계속 소마를 밖으로 내던지고 다른 손으로는 공격해오는 군중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그게 그 얼굴이었다. 

    “자유다!” 하고 다시 외칠 때 갑자기 그의 옆에 헬름홀츠가 와 있었다. 

    “착한 헬름홀츠!” 그는 여전히 주먹질을 멈추지 않으며 그를 반겼다. “마침내 인간이 된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열린 창문을 통해 한 줌씩 소마를 버렸다. 

    “그렇다. 이제 인간들이 되었어! 인간이!”



    결투장의 입구에서 머뭇거리던 버나드는 “둘 다 죽겠군”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의 채찍을 받아 그들을 돕기 위해 앞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발을 멈췄다. 그러나 곧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다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굴욕적인 우유부단의 번뇌에 사로잡혀 서 있었다 — 내가 돕지 않으면 두 사람은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을 돕다가는 내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포드 님에게 찬미하라!) 돼지 주둥이 같은 코가 달린 방독면과 물안경을 쓴 경찰들이 뛰어들었다. 

    버나드는 경찰관들 쪽으로 달려갔다. 버나드는 양팔을 흔들었다. 이것은 어떤 행위였고 그는 분명 뭔가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살려!”를 몇 번 반복했다. 자신도 구조업무를 감당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려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p.269–271




    “왜 비슷한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까?”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강철이 없이는 값싼 플리버 승용차도 만들 수 없어.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산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자네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 말일세. 자유라!” 총통은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델타 계급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다니!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자네답군!”

    야만인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p.279




    야만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소름끼칠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실제의 행복이란 것은 불행에 대한 과잉보상에 비하면 항상 추악하게 보이는 법일세. 또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안정이란 것은 불안정처럼 큰 구경거리가 될 수 없는 법일세. 따라서 만족하는 생활은 불행과의 처절한 투쟁이 지니는 매력이나 유혹과 투쟁이 지니는 장관이나, 정열 내지 회의에 의한 치명적인 패배가 지니는 장쾌함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야. 행복은 결코 장쾌한 것이 아니야.”


    p.280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거든.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해. 우리가 새로운 발명을 선뜻 적용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순수과학에서의 모든 발견은 유해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거든. 과학도 때로는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다루어야 돼. 그렇지, 과학조차도 그렇지.”



    “그렇지.” 무스타파 몬드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것도 안정을 위해 희생시켜야 할 품목이야.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예술뿐만이 아니야. 과학도 마찬가지야. 과학은 위험한 것이야. 우리는 그것을 용이주도하게 묶어놓고 재갈을 물려 놓아야 해.”


    p.285




    “하지만 신은 모든 고귀하고 아름답고 비장한 것의 근거가 아닙니까? 만일 신이 있다면…”

    “젊은 친구”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문명은 고귀함이나 비장함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세. 그러한 것은 정치적 비능률을 나타내는 징후일 뿐이야. 우리처럼 적절히 조직된 사회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고귀하고 영웅적이 될 기회란 있을 수 없는 걸세. 그러한 계기가 발생하기 전에 여건이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겠지. 전장애 일어나거나 어느 쪽에 충성을 맹세할지 모르는 경우이거나 저항해야 할 유혹이 있거나 쟁취하거나 방어할 사랑의 대상이 있는 경우 —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고귀함과 비장함도 어떤 의미를 가질 거야. 그렇지만 오늘날엔 전쟁이 없단 말일세.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최대의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일세. 어느 쪽에 충성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조건반사 훈련이 되어 있단 말일세. 또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대체로 매우 유쾌한 것이며 여러 가지 자연적인 충동은 모두 자유롭게 만족되기 때문에 저항할 유혹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만일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어떤 불쾌한 사태가 일어나면 까짓것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도피시켜 줄 소마가 항상 준비되어 있네.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과 화해시키고, 인내하고 수난을 참도록 하는 소마가 있다 이 말이야. 옛날에는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거치고 오랜 수양을 쌓아야 겨우 도달되는 미덕이었지. 그러나 이제 반 그램짜리 두세 알만 삼키면 그러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일세. 이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네. 그러니까 덕성의 반은 적어도 병 속에 지참하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야.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기독교 정신을 터득하는 것 — 그것이 소마의 본질일세.”


    p.302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변화를 위해 눈물이 따르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하고 야만인은 말을 계속했다. 

    “이곳에는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p.303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 하고 그가 말했다.


    p.305


    ->끝내 "야만"이라 칭해지는 자유를 선택하는 엔딩이 좋았음... 본편 외에 마지막에 삽입된 제 3 사회 설정도 흥미로웠다.










    헉슬리는 이 <<멋진 신세계>>를 발표하고 십 몇 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 소설의 전후판의 서문에 작가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할 때만 해도 필자는 이 소설의 중요 인물인 문명국을 방문한 야만인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문명국에서의 바보들의 행복에 의한 미치광이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야만국으로 돌아와서 그 우매함과 추악함을 감수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가능성이었다. 어느 편도 구원이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쓰면 양자택일을 떠나서 야만족 주변에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다고 술회했다. 



    #2023리뷰 #올더스_헉슬리 #SF #디스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