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리뷰
천 개의 파랑
천선란
2020년 8월 19일 초판 1쇄 발행
좋았던 구절
이제 내 다리는 투데이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투데이는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것이다.
투데이는 며칠 전까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였고 나는 폐기를 앞둔 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투데이는 다시 주로를 달린다. 나는 떨어지고 있다. 땅에 닿으면 부서진다. 인간을 이런 예측을 본능적인 감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확한 수치와 계산에 의한 결괏값만을 산출한다. 내 미래에는 예측 오류란 없다. 나는 내가 여기 오게 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일을 말하고 싶다.
내 이름은 콜리다. 브로콜리의 색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p.10
—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빠르고 무엇이 느려도 된다는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궁금했으면서 왜 묻지 않았을까. 보경은 그 순간의 자신을 자주 탓했다. 그때 묻지 못한 죄로 그 말에 대한 궁금증은 영원히 미제로 남았다.
p.164
—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p.168
—
봐봐, 없지?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열심히 할 거야.
뭐를?
뭐든! 밥 먹는 거든, 약 먹는 거든, 운동하는 거든, 공부하는 거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열심히 하고 있을래. 그렇게 있다 보면 무슨 일이든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알겠어.
뭐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걸 해볼게. 그리고 내가 나를 응원해볼게.
p.187
—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산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p.189
—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p.204-205
—
복희는 정정해야 했다. 관심이 없어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다. 어느 생명체의 일생을 전부 책임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생을 마감한 동물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는 것도 겁났다. 복희는 자신이 철저하게 겁쟁이였음을 수의사가 된 후에 인정했다. 이곳에 오는 보호자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는 자들의 자세.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으며 복희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p.246
—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p.278
—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화재가 난 빌딩 속에 있던 소방관을 기다리던 그 시간에 멈춰 있어. 반드시 살아서 나오리라 믿고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무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p.285-286
—
지수는 단순하다. 3주 남짓 억지로 붙어 있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표정이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표정과 말이 달라 오류를 일으킬 때도 많았다. 그런 지수의 모습이 이상하거나 싫다는 건 아니었다. 연재가 짖지 못하는 표정이어서 신기해 오래도록 보는 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p.291
—
콜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연재는 생각해본 적 없던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연재는 그 대화 탓에 그날 밤 잠들기 직전까지 바다에 빠진 지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했듯이 아홉 명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수를 가장 먼저 구할 거였다. 보경이 있었다면 보경을, 은혜가 있었다면 헤엄을 칠 수 없는 은혜를 가장 먼저 구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 번째네.
연재는 누워서 세 번째나 네 번째가 될 만한 사람이 더 없는지 고민했다. 민주도 떠올랐지만 민주는 개헤엄을 쳐서라도 살아남을 사람 같았다. 다영과 지수 사이에서는 꽤 오래 고민했는데 불현듯 다영이 수영을 취미로 배운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세 번째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그랬다. 이 사실은 지수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으리라. 말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괜히 말해줬다가 평생 놀림을 받을 게 눈에 훤했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지수에게 자신은 과연 몇 번째일까.
p.295-296
—
“알겠어, 알겠어, 고마워 죽겠다고? 네 속마음으로 다 들었어.”
지수는 이미 연재에게 고맙다는 말 듣기를 포기했으니 그걸로 고맙다는 말을 퉁쳐도 됐을 거였다. 지수도 더는 기다리지 않는 낌새였다. 하지만 연재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엉?”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려던 지수는 도로 손을 내리고 되물었다.
“고마흐다고.”
p.297
—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옆에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p.327
—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p.349
—
나의 최후다. 엉덩이부터 상체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맑은 하늘이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p.354
—
심사평 중
이지용 건국대 학술연구교수
… 다양한 소재와 설정,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잡지 못하고 파편화된 상태로 부유하는 모습들이 많았다. 소재를 차용하고 세계관을 설정한 작가조차도 그것을 충분히 신뢰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SF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경이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작가가 먼저 설정한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재와 설정을 그저 나열하게 되면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한계를 드러내지만, 결국 독자가 작가가 설정한 경이의 세계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결말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결망에서의 파급력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경이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세계 안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p.362